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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씨 - 복식학자 석주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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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한복디자이너 이영희 씨 - 복식학자 석주선 박사

입력
2004.02.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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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디자이너 이영희(68)씨에게는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한 사람은 어머니요, 한 사람은 복식학자 석주선(1911∼1996)박사다. 어머니는 그에게 안목을 가르쳐 주었다. 집안 식구들의 옷 전부를 짓고 밤 껍질, 포도 껍질 등으로 물을 들일 때는 늘 어린 딸에게 의견을 물었다. 일찌감치 우리 옷의 색감을 터득한 그는 자연스레 한복 짓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성신여대에서 염색 디자인을 전공하고 1976년 '이영희 한국의상'을 개업했다.하지만 막상 한복집을 내고 보니 답답하기만 했다. 원하는 대로 옷을 지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진한 원색의 양단, 공단 일색이던 당시 옷감들에서는 어려서 어머니가 만들어 주었던 색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 그 색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수소문 끝에 79년 석주선 박사가 소장으로 있던 민속학 연구소(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전신)를 찾았다. 석 박사가 평생 모은 우리 옷 3,000여 점이 있는 곳이었다.

이영희씨는 "석 박사의 박물관을 들어선 순간, 아 진짜 우리색이 여기 있구나 했어요"라며 지금도 그 순간을 기억한다. 가라앉은 분홍색 모시 치마 위에 얹어진 녹두색 명주적삼 저고리의 기녀옷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날부터 석 박사에게 책을 얻어 우리 옷을 연구하며 직접 색을 만들기 시작했다. 석 박사는 꼭 그대로 옷감을 짜보고 싶다는 그에게 박물관 유리장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특혜를 베풀기도 했다.

석 박사와의 만남은 80년대 초 이씨가 서울 압구정동 석 박사의 집 근처로 의상실을 옮기면서 부쩍 잦아졌다. 석 박사는 한복의 디자인이나 색깔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었다. "한복은 손이 가는 옷이야. 한 올 한 올 정성으로 짓는 거지. 바늘땀이 조금만 벗어나도 제 모양이 나지 않아"라고 했다. 한복을 만들면 만들수록 마음에 와 닿는 말이었다.

석 박사는 또 "한복은 우리만 입기엔 너무 아까워. 세계에 알려야 해"라는 말로 당시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한복의 세계화를 독려했다. 84년 이영희씨가 스란치마를 변형한 이중치마, 꽃수를 놓은 넓은 소매단 등 당시로서는 디자인, 색깔 모두 파격이었던 '개량한복'을 처음 발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다. 발표 직후에는 "국적 없는 옷"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전통복식을 전공한 원로 학자 석 박사가 나서 "옷은 시대에 맞춰야 한다"며 일갈하자 비난은 찬사로 바뀌었다. 맘 졸이던 이씨는 그제서야 마음껏 옷을 만들 수 있었다.

93년부터는 파리 컬렉션에 진출, 저고리도 신발도 없이 치마만 입힌 모델들로 한복의 드레스화를 선도하며 '바람의 옷'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한국 디자이너로는 유일하게 이제까지 봄가을 한번도 거르지 않고 23번의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그의 노력으로 이제 한복은 기모노의 일종이 아닌 한국의 옷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영희씨는 이제 자신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석 박사의 업을 이으려 한다. 3월 미국 뉴욕 맨해튼 32번가에 '미래문화박물관'이라는 한복상설전시관을 연다. 스승을 따라 하나 둘 모아온 우리 옷과 장신구를 전시하고, 김치 담그기 같은 한국문화체험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제가 처음 석 박사의 박물관을 찾았을 때 느꼈던 우리 옷의 감동을 세계 패션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전세계인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이만 하면 저도 석 박사 흉내를 좀 내는 것이지요?" 전통이 무엇인지, 우리화와 세계화는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일러준 스승의 가르침은 아직도 제자가 만드는 한복 속에 살아 있다.

/김지영기자 koshaq@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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