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의 의식불명 환자. 이를 구하려 땀과 피로 범벅된 가운을 입은 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의사와 간호사.' 병원 응급실 모습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외화 시리즈 'ER(응급실)'을 열심히 보았던 사람일 것이다.하지만 국내 병원 응급실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의사들이 고된 업무에다가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어서 응급실 근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전국적으로 응급처치 단계의 사망률이 50%에 달해 선진국의 10∼20% 보다 훨씬 높은 실정이다. 또 의료사고 부담이 큰데다 밤에는 술에 취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나 막무가내로 수술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는 사람이 많다. 신변 위협까지 느낄 정도로 근무환경이 열악하다. 의사들은 응급실에 근무하는 것을 '막장 간다'고 자조하고, 응급의학과를 '잡탕과'라고 부른다.
서울 한 중형병원에 고용된 월급쟁이 응급의의 연봉이 2,000만원도 안되고 신분도 계약직이어서 사회보험도 적용받지 못한다. 의대생도 개업을 하지 못하는 응급의학과에 거의 지원하지 않는다. 응급의를 구하기 힘들자 인근 대학병원에서 레지던트를 꿔오는 경우도 병원도 적지 않다. A병원 관계자는 "전공의 수준의 돈을 주어도 응급실 전담 의사를 구하기 어려워 전담 의사를 두지 못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보건복지부 조사결과, 지난해 유명 대형 병원들의 응급실 의사 충원율은 40% 정도에 그쳤다. 상황이 이렇자 응급실을 폐쇄하는 병원이 속출하고, 급기야 얼마 전 가짜 의사가 응급실에서 수술하다가 검찰에 적발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별도의 응급실 전담 의사가 없는 중소병원의 경우 전문의 대신에 '알바(아르바이트) 의사', 공중보건의, 군의관과 심지어 의사 면허도 없는 '오더리'가 응급 환자의 치료를 맡고 있다. 오더리란 의사의 '오더(order)'를 받아 지혈이나 봉합 등 간단한 처치를 대신하는 사람을 일컫는 의료계의 은어.
선진국의 응급의 위상은 어떨까. 우리와는 정반대로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다. 미국의 경우 하루 24시간 근무하면 이틀을 쉬고 봉급도 의사들 가운데 1, 2위를 다툴 정도로 높다.
"응급실에 오는 중환자가 초기 1시간 이내에 어떤 치료를 받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린다"는 한 응급 전문의의 말이 공허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권대익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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