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 보도'의 대명사로 통했던 영국의 BBC 방송이 켈리 사건으로 최대 시련에 직면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는 29일 "세계 최대의 공영방송인 BBC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정보 조작 논란으로 82년 역사상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도했다. 영국 정부의 WMD 정보 조작 의혹 사건을 조사해온 허튼 위원회가 전날 "정부가 WMD 정보를 조작했다는 BBC의 보도는 근거 없는 것이었으며 방송의 운영 체제에 결함이 있었다"며 블레어 정부의 손을 들어준 것은 BBC에 큰 충격이었다. 보고서 발표 직후 영국 일간 텔레그라프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BBC의 신뢰도는 81%에서 67%로 떨어졌다.BBC 수뇌부의 사퇴와 사과
허튼 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온 직후 데이비스 이사장이 즉각 사임했고, 하루 뒤인 29일 그렉 다이크 사장이 이사회의 압력을 받아 물러났다. BBC의 이사장과 사장이 오보 논란과 관련해 사임한 것은 BBC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BBC의 제작진 수백명은 사장 퇴임에 충격을 받고 잠시 '소리 없는 방송'을 내보내는 등 항의 시위를 했다. BBC의 이사장 대행인 리처드 라이더 경은 "무조건적으로 사과한다"고 말해 블레어 정부와의 싸움을 일단락지었다.
BBC의 개혁 방향
영국 언론들은 앞으로 보도국장을 비롯한 BBC 간부들의 무더기 사임과 교체 폭풍이 몰아닥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정부의 입김이 가해져 공정성이 훼손될 것인지 아니면 '비온 뒤 땅이 굳듯이' 공정 보도의 토대가 강화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블레어 총리는 "BBC의 독립성을 전적으로 존중한다"고 강조하고 있어 방송의 공정 보도 기조는 유지될 것이란 견해가 많다. 다만 운영 체제에 대한 개선과 보완이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 우선 BBC 방송의 운영 방침, 시청료를 거둘 수 있는 권리 등을 규정한 '로열 차트'의 손질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광고가 금지된 BBC는 연간 30억 파운드에 달하는 운영비를 TV 수상기 한 대당 연간 116 파운드인 시청료와 프로그램 판매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영국 정부는 2006년 말 시효가 만료되는 로열 차트의 개정 방침을 수차례 밝혀 왔다.
블레어도 상처
켈리 사건으로 상처 입은 것은 BBC만이 아니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허튼 보고서가 나온 직후 BBC의 사과를 촉구하는 등 큰소리를 쳤지만 그의 정치적 위기가 당장 사라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영국 일간 가디언의 여론조사 결과 블레어의 신뢰도는 허튼 보고서 공개 이후 오히려 2% 가량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또 더 타임스의 여론조사에서도 BBC에 대한 신뢰도가 블레어에 대한 신뢰도 보다 3배 가량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영국의 상당수 언론들이 "허튼 보고서가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고 보도하는 것도 블레어에게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김광덕기자 kdkim@hk.co.kr
● 켈리 사건
'켈리 사건'은 BBC가 '이라크 대량살상무기(WMD) 정보가 조작됐다'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취재원인 국방부 무기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박사가 자살한 사건이다. 2002년 9월 영국 정부는 '이라크가 45분 이내에 발사할 수 있는 WMD를 보유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이에 대해 지난해 5월 BBC의 앤드루 길리건 기자가 익명의 소식통을 토대로 "총리실이 보고서를 왜곡했다"고 보도한 뒤 취재원으로 지목된 켈리가 7월 자살했다. 파문이 커지자 토니 블레어 총리는 허튼 판사에게 조사를 요청했고, 허튼은 27일 'BBC 보도는 근거 없는 것'이란 요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발표 직후 BBC 이사장과 사장은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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