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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장충체육관 "실내스포츠 시대"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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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50년]장충체육관 "실내스포츠 시대" 열다

입력
2004.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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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 2. 1장충체육관 개관

국내 첫 현대식 실내체육관이 중구 장충동 구 육군체육관자리 4,250평의 대지 위에 건립됐다. 돔 건축물에 전자시계와 전광식 농구 스코어보드를 갖춘 대형 체육관의 탄생으로 인해 당시 최고인기의 실내 스포츠인 농구와 함께 배구 탁구 복싱 레슬링 역도 체조 배드민턴 등의 경기가 겨울철에도 가능하게 됐다.

특히 김기수의 세계타이틀전을 비롯한 프로복싱 경기와 김일 장영철 등의 프로레슬링이 열릴 때는 수용인원 8,000명을 훨씬 초과한 1만여명이 몰려 투기의 메카로 자리잡게 되었다.

장충체육관은 79년의 잠실 실내체육관 건립과 강남 발전으로 서서히 명성을 잃어 현재는 주로 콘서트와 소규모 대회의 경기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씨름 전용경기장으로 전환하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1963.2.2

박정희장군배 쟁탈 동남아여자농구대회

장충체육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첫 대회였다. 한국과 팽팽한 전력을 보유한 일본의 日紡, 자유중국(대만)의 亞東팀과 한국의 상업은행, 한국은행이 출전했으며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대장이 정복 차림으로 개회식에 참석, 치사를 했다.

175㎝의 아시아 최고센터 박신자가 이끄는 상업은행은 연일 만원 관중의 응원을 받아 5승1무로 우승을 차지했다.

1차리그 3차전서 상업은행은 일본에 끌려 가다 종료 10초전 박신자의 극적인 골로 비겨 2승1무로 공동선두를 이루고, 2차리그 마지막 재대결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대회는 중간에 두차례 중단되며 73년까지 열렸다.

1991. 2. 2

최희용 WBA 미니멈급 타이틀 획득

홍수환 이열우 문성길에 이은 한국 프로복싱 4번째 두체급 석권의 주인공 최희용(24)의 첫 타이틀 획득은 찜찜한 뒷맛을 남겼다.

기량과 스피드가 좋은 그는 힘과 관록의 챔피언 김봉준(26)을 고향 부산으로 불러 도전했다. 경기는 2회에 최희용이 한 번, 5회에 김봉준이 두 번 다운을 뺏는 화끈한 난타전 끝에 최희용이 심판전원일치 판정승. 그러나 판정에 불만을 가진 관중들의 소동이 일어났다.

말썽의 소지는 경기 전부터 보였다. 이례적으로 도전자측 프로모터가 주최한 타이틀전을 주관하는 외국심판 4명이 경기 전날의 조인식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주최측은 '챔피언측의 로비를 막으려 심판을 보호했다'는 변명을 했지만 양측의 감정이 악화되고 심판판정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결국 최희용은 WBA의 지시에 따라 8개월만에 김봉준과 재대결, 12회 판정승으로 불명예를 씻었다.

원정 5차 방어전에서 일본의 오하시 히데유키에게 판정패한 최희용은 95년 2월 울산에서 베네수엘라의 레오 가메스(35)에게 3―0으로 판정승, WBA 주니어 플라이급 벨트를 차지했다.

1992. 2. 3

정훈 파리오픈유도 우승

85년부터 91년까지 전국체전 7연패를 한 남자유도 71㎏급의 최강자 정훈(당시 체육과학대 조교). 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91세계선수권에서 동메달에 그치며 '안방용'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정훈에게 유럽 최고의 대회인 파리오픈은 세계챔피언으로 향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준결승서 프랑스 선수를 맞아 빗당겨치기로 절반승을 거두었으며, 이 경기에서의 손가락 탈골에도 불구 결승에서 특유의 악바리 근성으로 독일의 슈포렐보르에 다시 절반승, 첫 세계무대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올림픽과는 인연이 없었다. 92 바르셀로나대회에서 4강까지 승승장구했으나 하야토스(헝가리)와의 준결에서 우세한 경기를 하다 종료 8초전 한판을 허용했다.

결승에만 올랐다면 1주일전 무릎 인대를 다친 라이벌 고가(일본)가 상대라 쉽게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러나 93년 10월 세계선수권 결승서 하야토스를 다시 만나 2―1 판정으로 설욕,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94히로시마아시안게임서 2연패를 이루었다.

유석근 편집위원 sky@hk.co.kr

■그때 그사람/마낙길

'야생마' 마낙길.

184㎝의 크지 않은 키지만 고무공 같은 탄력으로 8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배구코트를 휘저은 그는 지금 36세의 현대자동차 최연소 지점장이자 최우수 지점(혜화)의 지휘관이다.

86년 광산공고 시절 아시아청소년선수권 우승, 87년 성균관대 1년때 세계청소년선수권 우승의 주역을 담당하고 86년 고3때부터 94년까지 국가대표로서 아시아선수권 3연패, 소속팀 현대자동차서비스의 두 차례 슈퍼리그 우승을 만들어 낸 슈퍼스타는 97년 4월 은퇴와 함께 자동차 판매에 나서 7년간 영업 일선을 뛰고 있다.

"배구장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많은 선배 동료들이 다시 코트로 돌아가 지도자 생활을 하지만 저는 일단 발을 들여 놓은 이상 지점장까지는 하자고 마음 먹었었거든요. 그래서 한동안 배구는 잊고 살았고, 지난해 2월 지점장이 된 다음부터 저녁에 대학생 동아리들을 지도하며 배구 붐 재건에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그는 영업점 발령후 8개월만에 업무과장에 오르고 6년만에 지점장으로 초고속 승진을 했다. 그리고 2003년 상반기 최우수 지점, 하반기 우수지점을 만들었다.

"IMF 시절 연체와 채권관리 업무를 할 때 도산하는 고객이 많아 가장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한번은 업무용 차 3대를 산 고객의 할부금이 연체돼 같이 배구를 한 직원들과 찾아 갔다가 차와 분당의 47평짜리 아파트를 모두 날리고 성남의 판잣집으로 옮긴 것을 보고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집에 있는 아이들이 딱해 빵을 사주고 왔는데 나중에 그 고객이 '할부금이 연체됐다고 조폭을 보낼 수 있느냐'고 항의하고는 며칠 만에 친척들에게서 빌렸다며 2,700만원을 모두 보내는 웃지 못할 일이 있었어요. 결국 덩치가 커 조폭으로 보인 게 득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선수시절의 후원자와 팬클럽 회원들이 주위 사람들을 소개해 줘 큰 힘이 되었다며 "그래도 최우수 지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5명의 직원들이 목표의식을 갖고 뛴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마 지점장은 항상 직원들에게 목표의식을 강조한다. "매일 목표를 정하십시오. 오늘 맛있는 음식이 먹고 싶다면 일을 미루더라도 반드시 이루도록 하십시오. 하루, 1주, 한 달의 계획을 세워 정확하게 실천하는 습관을 들이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습니다."

덕분에 혜화지점은 2003년 12개월간 한번도 빠짐없이 목표를 100% 이상 달성, 연간 목표의 108%를 기록하는 성과를 올렸다.

일과 후면 매일 서울대 서울교대 고려대 연세대 등 대학들의 배구 동아리를 순회하며 지도한다. 연습은 밤 12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선생님이 어떤 종목을 좋아 하느냐가 어린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미래의 교사가 많은 동아리 학생들의 지도에 열성을 쏟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팀은 직접 감독을 맡아 매번 동아리대회 우승을 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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