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경제부와 법무부가 입주해 있는 정부 과천 청사 1동에는 비밀번호를 눌러야 출입이 가능한 사무실이 딱 한 군데 있다. 8층 한쪽 구석에 위치한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FIU·원장 김병기). 국내 금융기관을 통한 수상한 돈 거래에 대한 정보는 모두 이곳으로 집중된다. "자금세탁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FIU는 검찰의 수사 과학화를 위해서는 필수적입니다." 검찰처럼 쟁쟁한 정치인 구속이나 폭력조직 일망타진 등의 요란한 수사결과 발표는 없지만, 이곳 46명 직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정연수 FIU 심사분석실장(부장검사)은 "검찰은 부패를 단죄하지만, FIU는 부패를 포착·적발하는, 반(反) 부패의 최일선에 서 있다"고 말했다.2001년 11월말 설립된 FIU가 지난해 말까지 국내 금융기관으로부터 통보 받은 혐의거래는 총 2,019건. FIU는 이를 분석, 이중 465건을 검찰, 경찰, 국세청 등에 수사 단서로 제공했다. 465건 가운데 수사가 종료된 사건이 200여건이며, 이중 29건이 기소됐다.
진경준 심사기획팀장(검사)은 "금감위, 국세청, 관세청 등의 행정처분까지 포함하면 FIU가 수사기관 등에 통보한 혐의거래 가운데 30%의 혐의가 확인됐다"며 "검찰 등에 통보된 정보를 일일이 공개할 수는 없지만, FIU가 닭 잡는 칼이 아니라, 소 잡는 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FIU가 검찰 등에 통보한 혐의거래 중에는 기업의 비자금 조성이나, 기업 대표이사의 비리가 가장 많다. 예를 들어 기업의 재무상황을 보면 곧 넘어질 것 같은데, 대표이사 가족들 앞으로 거액이 입금됐다면 십중팔구 기업 대표의 착복이라는 것.
금융기관이 FIU에 통보해야 하는 혐의거래에 정형화된 가이드라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원칙적으로 '5,000만원(올 1월말부터는 2,000만원) 이상이면서, 자금 세탁 혐의가 짙은 거래'라고 규정돼 있지만 자금세탁의 수법이 워낙 교묘하기 때문에 금융기관 직원들의 직관에 크게 의존한다. 매출이 월 10억원 밖에 안 되는 기업의 계좌로 어느날 갑자기 100억원의 현금이 입·출금됐다거나, 소득이 별로 없는 개인의 계좌에서 고액의 현금이 입금 당일 인출됐다거나 하면 대부분 통보 대상이다.
금융기관이 제공하는 혐의거래를 분석, 혐의를 보다 분명히 하는 게 바로 FIU의 몫이다. FIU는 이를 위해 각종 자체 데이터베이스나 행정기관의 자료를 이용한다.
개인의 계좌가 문제 될 때는 그 개인의 범죄경력이나 세금납부·출입국 실적 등을 살펴보는 것은 기본이고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재산상태를 확인하거나 신용정보회사가 가지고 있는 각종 개인 신용정보도 훑어본다.
진 팀장은 "사기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의 경우 과거 사기전과 판결문을 숙독하면, 대충 자금세탁의 윤곽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또 기업의 계좌가 문제될 때는 그 기업의 재무상황부터 확인하는 것이 순서다. 고액의 현금 입·출금이 있을 경우, 이정도 거래가 있을 만한 회사인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분석된 혐의거래는 대표이사 횡령건, 조세 부정 환급건 등의 식으로 분류돼 검찰, 경찰, 국세청, 관세청 등 법 집행기관에 보내진다. 진 팀장은 "지난해에는 금융기관의 통보자료와 한국은행의 외국환 거래 자료를 비교·분석한 뒤 파산한 기업주들이 해외로 회사자금을 빼돌리는 사례를 대거 적발해 법 집행기관으로 넘겼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는 금융기관 직원들 스스로 신문에서 검찰이 누구누구 조사한다는 보도를 접하고, 검찰도 모르고 있던 계좌를 제보해 오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해외로 돈을 빼돌리기가 더욱 더 힘들어질 전망이다. FIU가 지난해 말 영국 호주 일본 등 11개국과 자금세탁 정보를 교환하기로 한 데 이어, 올해부터는 미국 등 19개국과 금융거래를 교환, 국제적인 자금세탁에 대한 그물망을 구축할 예정이다.
김진규 FIU 기획행정실장은 "한국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자금세탁 방지기구인 APG의 공동 의장국인데다, 올 6월 서울에서 총회가 개최될 만큼 자금세탁 방지 분야에서 앞서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유병률기자 bryu@hk.co.kr
● FIU 구성은
FIU는 소위 돈과 관련된 범죄를 취급하는 정부 기관의 베테랑들이 총 집결한 '다국적 연합군'이다.
FIU에는 재경부 법무부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관세청 한국은행 금융감독위원회 금융감독원 등에서 파견된 46명의 자금추적 전문가들이 총 망라돼 있다. 금융 관련, 정부기관 파견 인력들이 자금세탁 혐의를 구체화하면, 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파견된 인력들이 범죄 단서를 포착한다. 형식적으로는 재정경제부 산하기관이지만, 실제 운영은 독립적으로 이뤄진다.
FIU는 원장 아래 2실4과 체제로 구성돼 있다. 기획행정실은 국제협력이나 법령·규정 등을 담당하며, 여기에 소속된 제도운영과는 금융기관에 대한 교육 및 검사·감독을, 조세정보과는 탈세 정보를 분석한다. 심사분석실은 금융기관으로부터 통보 받은 혐의거래를 분석, 범죄 행위를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심사분석 1과는 국내 금융거래, 심사분석 2과는 외환거래를 집중 분석한다.
■교묘해지는 자금세탁 수법
자금세탁 수법이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다.
자금세탁(money laundering)이란 범죄로 얻은 더러운 재산(dirty money)을 정당한 경제활동으로부터 얻은 깨끗한 재산(clean money)처럼 보이게 출처나 소유 관계를 은폐하는 행위.
1920년대 미국에서 '알 카포네'와 같은 범죄 조직들이 도박이나 불법 주류판매를 통해 얻은 수입을 주로 세탁소(laundry)를 이용해 합법적인 소득인 것처럼 가장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자금세탁의 대표적인 수법은 금융기관이나 백화점 등을 통한 수표 바꿔치기. 은행 직원들이 기업 비자금 담당자들에게 받은 수표를 전표도 작성하지 않고 일반 고객에게서 받은 정상 수표와 임의 교환하는 식이다. 또 백화점을 계열사로 끼고 있는 대기업들이 고객이 사용한 수표로 돈 세탁을 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고객들이 물건을 사면서 사용한 10만원권 수표를 모아 뇌물로 전달할 경우 꼬리가 밟힐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수표 바꿔치기에 비하면, 여러 계좌로 반복적인 입출금을 통한 돈 세탁은 적발이 한결 어렵다.
특정 창구에서 수표로 예금을 인출한 다음, 이 수표를 다른 금융기관의 여러 창구로 나눠 넘기는 과정을 반복한 뒤 마지막 단계에서 새 수표를 발급 받는 것이다. 결국 최초의 수표가 여러 창구에서 새 수표로 분산 발행되는 것으로, 자금 추적을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현금 입·출금이 동원된다.
이 외에도 정치인들이 뇌물로 지급 받은 수표를 금고에 장기간 보관, 수사 종료시점까지 이 수표가 시중에 나돌지 않으면 수사기관도 이를 찾아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또 노숙자 명의로 통장을 개설해 송금을 받을 경우에도 수사기관을 쉽게 따돌릴 수 있다. 주민등록증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계좌를 개설할 수 있는 맹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들 사례에서 보듯 자금 세탁을 적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금융기관 직원들이 의심이 가는 돈 흐름을 FIU에 신고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신종 수법도 많이 등장했다. 카지노나 보석상 같은 곳이 동원되면 금융기관을 통한 것보다 적발이 더 어려워진다. 최고급 보석을 뇌물로 받은 뒤 이를 외국에 갖고 나가 현금화하면 완전 범죄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예 인터넷 쇼핑몰 등과 같은 유령회사가 이용되기도 한다. 뇌물 제공자는 사람들을 고용해 PC방 등에서 물품을 주문하게 한 뒤, 물품 대금 명목으로 쇼핑몰 업자, 즉 뇌물 수수자에게 돈을 건네면 끝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도입돼 있지 않지만, 세계 자금세탁 방지기구인 FATF가 카지노 딜러, 보석상, 부동산 중개인, 변호사, 회계사 등에 대해서도 돈세탁 혐의거래를 의무적으로 보고하도록 제도 개선을 권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병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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