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아시아 전역으로 무차별 확산되고 있는 데는 해당 국가들의 미온적인 대응이 화근이 됐다는 지적이 많다. 바이러스가 이미 변이를 일으켜 기존 백신이 효력이 없어진 현재로선 예방이 최선책이지만, 각국이 자국의 이미지 등을 우려해 초기에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는 것이 화를 키웠다는 것이다.지금까지 조류독감 발생이 확인된 국가는 한국 일본 대만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파키스탄 라오스 중국 등 10개 국. 그러나 이중 상당수 국가들은 조류독감 발생사실을 수 개월 이상 은폐함으로써 질병 확산을 조기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 한사코 부인하다 뒤늦게 발병 사실을 실토한 태국에서는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고, 인도네시아는 지난해 11월 조류독감이 발생했으나 25일에야 정부가 이를 시인했다.
가장 우려스러웠던 중국도 27일 조류 독감 발생을 확인했다. 지난해 사스(SARS·중증 급성호흡기 증후군)로 크게 피해를 본 중국은 조류독감 발생 초기 방역·수입금지 조치 등을 통해 조류독감이 유입되는 것을 안간힘을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중국의 방역시스템이 워낙 허술한 데다 지난해 사스가 창궐할 때 중국 정부가 이를 수 주간 은폐했던 전력을 감안, 그간 중국을 예의 주시해왔다. 엄청난 인구가 밀집해 있는 중국으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유포된 것이 사실로 확인됨에 따라 지난해 800여 명의 사망자를 냈던 사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재앙이 될 가능성이 적지않다. 알렉산더 다우너 호주 외무장관은 27일 "국가간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발생사실을 조속히 인정할수록 해결도 빨라진다"며 아시아 각국에 진상을 정확히 밝힐 것을 촉구했다.
중국이 조류독감의 예외 지대가 아니라는 징후는 이미 여러 차례 드러났었다. 홍콩 문회보(文匯報)는 26일 현지를 다녀온 여행객들의 말을 인용, 베트남과 인접한 광시(廣西) 자치구 난닝(南寧)시의 한 농장에서 춘지에(春節·설) 이전부터 19일까지 모두 200마리의 오리가 집단 폐사하는 첫 의심사례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 직후 중국 정부는 "오리의 집단폐사에 관한 보고를 받지 못했다"며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질병이나 독극물에 의한 폐사일 것"이라고 원인이 조류독감일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하루 만에 이 같은 입장을 뒤집어 지난해 사스 발생 때에 이어 또 한번 국가 신뢰도에 상처를 입었다.
조류독감 재앙론의 또 다른 시나리오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전염 가능성이다. 지금까지는 독감에 걸린 조류와 접촉한 사람들이 희생됐으나 이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나타나는 독감 바이러스와 합쳐져 변형될 경우 사람 사이에 전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개발하는 데는 통상 6개월 이상 걸리기 때문에 치사율이 30%에 육박하는 이 바이러스가 사람에게 전이된다면 파장은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최근에는 사람이 조류독감 바이러스에 걸릴 수 있는 새로운 전이 루트가 제시돼 한층 위기감이 고조됐다. WHO는 바이러스에 걸려 도살 처분된 뒤 강에 버려진 가금류가 돼지농장으로 흘러 들어가 돼지를 전염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돼지는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할 정도로 유전자 구조가 사람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일단 돼지에 감염되면 사람에게로의 전염은 급속히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이다. WHO는 이 때문에 "감염된 가금류를 조기에 발견해 없애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살된 가금류가 적절히 관리됐는가를 점검하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조류독감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자 아시아산 가금류에 대한 수입금지가 잇따라 경제적 피해도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러시아는 한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의 가금류 수입을 금지한 데 이어 26일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대만 등으로부터도 수입을 전면 금지했다. 태국은 수출액이 연간 600억∼700억 바트(1조 8,000억∼2조 1,000억 원)에 이르고 관련산업 종사자가 60여만 명에 달해 조류독감 사태가 조기에 잡히지 않는다면 국가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관광업계도 초비상이다. 아시아산 닭을 수입하지 않는 호주는 아시아 지역을 오가는 항공기 여행객에 대한 엄격한 검역조치를 취하고 있다. 이미 세계 각국이 호주와 같은 강력한 단속을 취할 것으로 예상돼 지난해 사스로 큰 타격을 입은 관광업계는 조류독감 사태로 또 홍역을 치를 전망이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 이종욱 WHO사무총장
이종욱(사진)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은 26일 "WHO가 조류독감 상황실을 설치하고 백신 개발을 위해 국제적 협력을 주도하는 등 조류독감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스위스 제네바 WHO 본부에서 조류독감 대처를 지휘하고 있다.
이 사무총장은 "이미 알려졌듯 WHO는 독감 환자의 체내에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침투, 유전자 정보를 교환해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하고 이 바이러스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염될 가능성을 각별히 우려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또 "조류독감의 전파는 철새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철새는 관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선 조류독감 증세를 보이는 닭을 도살하고 사육농장을 철저히 소독해 2차 감염을 차단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조류독감 대응에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백신 개발에 대해서는 "금명간 주요 독감 백신업체들과 접촉, WHO의 국제협력네트워크가 확보한 H5N1 바이러스의 샘플을 토대로 한 백신개발에 대해 본격 논의할 예정"이라고 이 사무총장은 말했다.
그는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근거리의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만 전염되는 것과는 달리 조류독감은 철새를 통해 넓은 지역으로 전파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스보다 더 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네바=연합
● 대처방안 어디까지
아시아에서 조류독감이 날로 확산되고 있지만 뾰족한 대처 방안이 나오지 않아 공포감만 커져 가고 있다.
현재까지 조류독감에 대해 취하고 있는 주요 조치는 닭 오리 등 가금류를 살처분 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조류독감 바이러스인 H5N1에 대해 확인된 정보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조류독감의 인체 감염이 조류독감에 걸린 가금류와 이것들의 배설물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18명의 조류독감 환자가 발생했던 1997년 홍콩 사태 때에는 환자 모두가 시장이나 농장에서 살아있는 가금류와 접촉했으며, 최근 베트남과 태국의 희생자들도 같은 감염 경로를 거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조류독감의 급속한 확산의 주범으로는 철새가 지목되고 있지만 통제가 불가능해 손을 쓰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27일 세계보건기구(WHO) 대변인은 "철새는 가금류와는 달리 조류독감에 걸렸어도 특별한 증상 없이 장거리를 날아다닐 수 있다"며, "WHO는 이런 철새의 떼죽음이 이번 조류독감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신호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백신 개발도 아직은 요원하다. WHO는 "바이러스가 변이해 백신 개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백신 개발에 6개월 이상 소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H5N1은 97년 홍콩 조류독감의 변형 바이러스로, 홍콩 조류독감에 대응해 WHO가 지난해 개발했던 백신으로는 예방이 불가능하다. 또 H5N1의 변이 속도가 매우 빨라 백신 개발 속도가 이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치료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WHO는 H5N1이 오래된 인간 독감 치료약인 아만타딘과 리만타딘에 내성을 갖고 있지만 최근에 개발된 타미플루와 레렌자로 이를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과학자들이 조류독감에 대해 가장 우려하는 것은 H5N1이 변이해 인간 대 인간 감염이 가능해 질 경우 살인적인 유행성 독감이 될 수 있다는 대목이다. 역사상 최악의 피해를 낸 스페인 독감은 1918∼19년 세계적으로 4,000만∼5,000만 명의 희생자를 냈었다.
/김이경기자 moonligh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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