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가린 내 삶의 고된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내 초지를 꺾지 않고 버티어 내려온 원동력은 바로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 사람의 정신이요, 그 나라의 여러 문화형태의 뿌리라는 주시경 선생과 그 제자들의 가르침이다.'26일 타계한 허웅 한글학회장이 10여 년 전 한 신문에 쓴 글에는 거의 평생을 한글 연구와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서 온 그의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0년 외솔 최현배 선생 타계 이후 한글학계는 가장 뛰어나고 열정적인 우리말 연구가를 잃었다.
허 회장의 한글 연구는 1세대 한글학자인 외솔 선생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동래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를 다니던 그가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하기로 굳게 결심한 것은 고보 3년 때 읽은 외솔 선생의 '중등조선말본'과 '우리말본' 때문이다. 1,000쪽이 넘는 '우리말본'은 하숙비까지 미루고 사서 붉은 줄 푸른 줄을 쳐가며 통독했다고 한다.
하지만 1938년 허 회장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당시로는 유일하게 대학 과정에서 우리말과 글을 강의하던 외솔 선생이 일본 경찰에 잡혀갔다. 그도 역시 우리말 수업이 없어진 학교에서 일본인이 가르치는 거짓 우리 역사를 들을 수 없었다. 이듬해 여름 학교를 그만두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폐병까지 겹쳤지만 이때 읽은 국어학, 언어학, 역사학 책들은 그가 평생 한글 연구와 우리말 지킴이로 살게 한 초석이 됐다.
해방 이후 서울서 잠깐 고등학교 국어 교사를 한 허 회장은 부산대·성균관대 조교수, 연세대 부교수를 거쳐 57년부터 30년 가까이 서울대 교수를 지냈다. 외솔 선생 타계 이후 한글학회장을 맡으며 15, 16세기 우리말 연구에 집중했다. '우리옛말본'(1975)과 후속으로 낸 '16세기 우리옛말본'(1989) '15∼16세기 우리옛말본의 역사'(1991)는 중세 국어학 연구의 역저다. 이에 앞서 60년을 전후해 펴낸 '국어 음운론' '언어학개론' 역시 관련 저서로 국내 처음이다.
'눈뫼'(눈 덮인 산)라는 자신의 호처럼 머리에 일찌감치 서리가 내렸지만 그는 최근까지도 열정적으로 한글 연구와 우리말 지키기 운동에 앞장섰다. '우리말 큰사전'(1991) '국어학사전'(1995) 편찬에 이어 98년에는 '한국지명총람'(1986)의 데이터베이스 작업에도 착수했다. 통일 이후 남북한 언어의 이질성을 줄이기 위해 북한 언어 연구 작업을 벌이는가 하면 한글 세계화 작업도 활발히 벌였다. 생전에 받은 성곡학술문화상, 세종문화상 등 숱한 상들은 이런 업적에 대한 평가다. "사라져가는 세대가 역사의 바른 길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며 한자 병용론자를 꾸짖은 허 회장은 최근까지도 신문 기고를 통해 한글 전용을 강력히 주장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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