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쟁점이 되고 있는 가운데 17일 일본 도쿄(東京)에서 아사히(朝日) 신문 주최로 '고구려와 동아시아'를 주제로 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한국 대표로 초청받아 참석한 임효재(63) 서울대 교수의 참관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진눈깨비가 뿌려 예사롭지 않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학술회의장인 '아사히 홀'의 700여 개 좌석은 빈 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심포지엄에는 남북한 문화재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지원해온 히라야마 이쿠오(平山郁夫) 유네스코 친선대사를 비롯, 지난 9월 세계유산위원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조사관 자격으로 중국 고구려 유적들을 돌아본 니시타니 다다시(西谷正) 큐슈(九州)대 명예교수, 재일동포 사학자 이진희씨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특히 중국 동북지역을 샅샅이 살펴보고 돌아온 니시타니 교수의 보고가 가장 관심을 모았다.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중국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현장 출입을 엄격히 통제해온 상황이라, 니시타니 교수의 발표는 그간의 사정을 알려주는 외부로의 최초 공개인 점에서 슬라이드 한 장 한 장이 비쳐질 때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특히 발굴현장이나 결과물에 접근할 수 없는 한국학자들은 물론 일본학자들도 1,500년 만에 모습을 보여준 유물들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구려의 탄생지인 랴오닝(遼寧)성 환런(桓仁) 시에 있는 오녀산성의 최근 발굴 성과는 놀라웠다. 지금까지는 연못이나 우물 같은 것이 알려졌을 뿐인데 서문, 궁전터, 군대 사용 건물터가 새롭게 드러났으며, 동남부에서는 견고한 석축 성벽과 동문과 서문의 모습이 깨끗하게 보였다. 이를 통하여 그 동안 잘 알 수 없었던 고구려 초기 역사상의 모습이 파악되는 수확을 거두었다. 또한 지안(集安) 퉁거우(通溝) 지역에서 한 변이 62.3m인 피라미드 모양의 거대한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호태왕(好太王)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길이 5㎝ 크기의 청동방울은 모든 참석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환도산성에 대한 조사에서도 남문, 궁전 등의 건물터가 나왔고 더욱이 평면 팔각형 건물구조가 보여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것은 불교와 깊은 관계가 있는 유적으로 생각된다.
회의장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은 한결같이 "중국의 고구려사 자국 편입 시도는 말도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고대 한국의 역사가 고구려, 백제, 신라로 명시돼 있다. 때문에 중국 영토의 고구려 유적들이 중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자동적으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편입되었음을 만천하에 공인하는 격이 되어버리니 일본 학자들로서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이 동시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될 예정이지만 그렇더라도 고구려 유적이 여러 곳에서 분산돼 고구려사 자체가 분해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 일본 측이 남북한 유적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지원하고 있지만 고구려 유적의 원래 국적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 중국, 일본이 펼치고 있는 동북아 고대사 전쟁은 장기전이 될 전망이다. 21세기에 들어 각국이 자국 역사 지키기에 집착하는 것은 정체성을 유지하고 문화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다. 우리도 우리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는 역사교육과 연구과정을 새롭게 개편해야 한다. 자기 역사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면 그 역사와 민족이 잊혀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역사 연구체제도 강화해야 한다. 고구려 역사와 문화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전문 연구소의 설립도 좋지만 인접 학문들과 제휴한 고고학 종합연구소가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인접 과학지식이 뒷받침된 연구 성과는 그 어디에 내놓아도 설득력이 있고, 그런 결과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해외 연구의 동향을 주시하면서 해외 연구자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세계 고고학계와 세계유산위원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국내 연구 성과 외에도 인접국 연구자들의 판단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해외 학회 참가 및 그 동향에 적극 대처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히라야마처럼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는 영향력 있는 인재도 키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자기 역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고구려사에 대해서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한반도와 중국의 문화유산 감독관 자격으로 세계문화유산 등록 여부에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일본학계는 여러 모로 우리의 귀감이 되고 있다.
/임효재<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세계고고학회 동아시아 대표>서울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