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논란이 어느새 수그러졌다. 안보 불안이 외국기업의 탈출 러시로 이어질 것이라고 호들갑 떨던 이들이 언제 그랬나 싶게 조용한 것이 의아하다. "땅 몇만 평이 아까워 미군을 내보내다니…"라며 개탄한 것이 진정한 우려였다면, 이대로 넘어갈 일이 아닌 것이다.우리의 보수계층은 철없는 반미와 어설픈 자주탓에 안보와 동맹이 위태롭다고 비분강개했다. 그러나 럼스펠드 국방장관이 뉴욕 한복판에 외국군이 주둔한다면 말이 되냐며 용산기지 이전 의지를 천명하자, 갑자기 머쓱한 듯 목소리를 낮췄다. 공연히 흥분하다가 무안 당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겉만 보면 마냥 미국에 기대어 추종하는 정서가 두드러지지만, 세상 변화에 아랑곳 없이 이 사회의 애국적 주류를 자처하는 수작이 엿보인다. 이런 강박의식이 용산기지 이전도 무작정 반대하고, 21세기에 필요없는 자주가 국가적 불행을 부른다고 강변하도록 작용하는 듯하다.
어리둥절한 것은 사심없는 국민들이다. 자주국가의 체모를 되찾은 것을 기꺼워해야 할지, 안보를 새삼 걱정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다. 기회주의적 언론과 전문가들은 뒤늦게 기지이전이 미국의 전략 변화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표변한 논리로 변화를 제대로 살필 리 없다.
럼스펠드가 대표하는 네오콘, 신보수주의 세력이 추진하는 미군 재배치는 불량국가 등에 대한 선제공격 전략을 앞세운다. 이 전략은 남미 안데스 지역에서 적도를 따라 북아프리카 중동 서남아를 거쳐 인도네시아 필리핀에 이르는 환상(環狀)의 '불안지대'(arc of instability)를 상정한다. 미국과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도사린 이 지역에 신속하게 미군을 투입, 선제 공격할 수 있도록 미군기지를 재배치하겠다는 것이다.
네오콘 전략가들은 '지구 기병대'(Global Cavalry)와 '연꽃잎'(Lily Pads)이란 제법 정의롭고 낭만적인 개념을 동원한다. 개척시대 뉴프런티어에 정의의 상징 기병대를 배치한 것처럼 전 세계 위험지역 가까이 기지를 구축, 개구리가 물을 건널 때 연꽃잎을 징검다리 삼듯이 미 본토와 영국 일본 등 충직한 동맹국에 있는 미군 주력을 투입하는 발판으로 활용한다는 개념이다.
대의명분은 그럴 듯 하지만, 적도주변 '불안지대'가 주요 유전지역과 겹치는 것부터 우연치 않다. 후진적 제3세계에 새 기지를 집중 건설하는 것도 눈에 띈다.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 파키스탄 필리핀 베트남 모로코 튀니지 등이 모두 그런 곳이다. 이에 비해 독일 한국 오키나와 터키 사우디 등의 냉전시대 주력기지는 감축 대상이다. 방대한 새 기지 건설과 유지를 감당하기 위해서지만, 반미감정과 주둔군지위협정 논란 및 환경규제도 고려됐다. 미 본토 육군기지의 3분의 1, 공군기지의 4분의 1도 폐지 대상이다.
대충 살펴봐도 냉전 종식으로 쓸모가 적고 부담은 많은 기지들을 향후 전략 가치가 크고 부담 적은 지역으로 이전하려는 계산이 드러난다는 지적이다. 미 본토와 독일 한국 등에서 여건이 열악한 곳으로 옮기기를 꺼리는 군부의 반대가 많은 점도 주목할 만 하다. 엄청난 비용과 본토기지 감축에 따른 지역경제 위축 우려도 장애 요인이다.
이렇게 볼 때 평택의 새 기지는 미국에 안성맞춤이다. 북한과 대치한 상황을 고려했겠지만, 공군기지와 군항이 지척인 점부터 '지구 기병대'와 '연꽃잎' 전략에 더 없이 편리하다. 건설과 이전까지 한국이 책임지기로 했으니, 이렇게 손쉽게 문제를 매듭지은 곳은 다시 없을 듯 하다.
문제는 우리끼리 외곬으로 안보 영향만 논란하느라 입지와 비용, 미군기지의 장래 등은 도외시한 것이다. 당장 평택의 반대여론이 부각되겠지만, 주한미군 문제를 넓고 길게 보고 자주적으로 대처하는 자세가 갈수록 절실해질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강 병 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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