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타계한 이한빈(李漢彬)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경제인으로, 시민운동가로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 지성인이었다. 1926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광복 후 첫 국비유학생으로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유학해 한국의 첫 경영학석사(MBA)가 됐다. 그는 고국이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주위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 임시수도에서 약관 25세에 중앙정부의 예산과장이 됐다. 이어 35세에 재무부의 첫 사무차관이 될 때까지 수직 승진을 계속했다.그러나 5·16쿠데타로 군부가 집권하자 협력을 거부, 마음에도 없던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다. 스위스, 오스트리아, 바티칸, 유럽공동체(EC) 대사 등 일견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본인은 이 시절을 '알프스의 유배'로 표현했다.
60년대 중반 귀국 후 서울대 행정대학원 창설을 주도하며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고, 68년 당시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한국미래학회를 창설, 학계를 놀라게 했다. 이때 집필한 '서기 2000년의 한국에 관한 조사연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역작으로 꼽힌다. 아주공대 학장 시절인 79년 12월 10·26사태 직후의 정치불안과 제2의 오일쇼크 등 최악의 상황에서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복귀했으나, 5·18 민주화운동 직후인 80년 5월 내각 총사퇴를 주장하며 취임 6개월 만에 물러났다. 이후 시민단체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자유지성 300인회' 공동대표로 활약했고, 공명선거를 위한 시민운동 등에도 앞장섰다.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한 고인은 교회가 앞장 서 북한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희정기자 hj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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