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전에 재직하던 대학에 있을 때 1학년 학생 두 명과 편안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는 각 당의 대선후보 경선이 막 끝난 시점이어서 정치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았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둘 다 A를 지지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치인에 대한 지지야 학생들의 자유이고, 또 대체로 젊은 층의 A 후보 지지도가 높았으니 예상할 수 있는 대답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지지 이유를 물었던 나는 순간적으로 얼어붙는 듯한 전율을 느껴야만 했다."B 후보는 엘리트라서 싫어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A의 어떤 정책이 좋아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B가 엘리트라 싫어서 A를 지지한다니! 더구나 어느 사회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은 엘리트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모골이 송연해진 나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를 물어보았다. B 후보는 집안도 좋고, 명문고, 명문대 출신이고, 거기에 고위공직까지 지낸 엘리트인데 그 중에 본인의 노력은 10%도 되지 않을 것이고, 90% 이상은 부모 잘 만나 거저 얻은 것일 거라는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학생들에게 거꾸로 물어보았다. B 후보의 집안이 유복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지만 그렇다고 자식의 명문교 진학을 보장해줄 수 있을 정도로 당대의 세도가였던 것도 아닌데, 너희들도 그 정도의 부모를 만났다면 B만큼의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었겠는가하고. 대답이 없었다.
계속해서 물었다. 너희들도 B 후보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사학에 들어왔으니 또래들 중에서는 이미 엘리트 집단에 속한 셈인데, 졸업 후 취직시험에서 엘리트 프리미엄을 없애기 위해 더도 말고 딱 5점만 감점한다면 받아들일 용의가 있느냐고.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엘리트인 B 후보에 대해서는 90점 이상을 감점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하면서, 엘리트인 본인들에 대해서는 5점 감점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일관성이 없는 것 아니냐고 의기양양하게 지적했던 나는 곧바로 돌아온 신세대적 순발력 앞에 할 말을 잃었다. "어떻게 사람이 일관되게만 살 수 있어요?"
이것은 하나의 에피소드일 뿐, 비슷한 경험은 사실 계속 이어져 왔다. 강의실에서, 대입면접시험장에서, 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반(反) 엘리트적 정서를 수없이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사회의 지난 경험이 그다지 공정치 못한 것이었으니, 그 속에서 부나 권력이나 명예를 이루어낸 사람들의 이면에는 분명 어두운 그림자가 있을 것이라는 짐작 하에 그들은 엘리트를 거부한다.
하지만 스스로 엘리트가 되기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이러한 자기모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미래 한국의 엘리트들은 고뇌하는 20대를 보내고 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이 성숙된 자신만의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들의 대답은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심어준 전형적인 '사고방식'의 극렬한 표출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에게 심어놓은 그 사고방식 앞에서 나는 공포를 느낀다. 이제는 기성세대가 그들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멍에를 거두어주어야 할 때다.
젊은이들이 엘리트를 숭상하고 엘리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서 엘리트가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투명하게 예측할 수 있고 그에 맞추어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사회, 다른 사람의 성공 과정에서의 잘못을 지적하는데 몰두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떳떳한 방식으로 더 큰 성공을 이룰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 그런 사회로 거듭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설 연휴를 지내고 가능성의 세계 속으로 또 한 해의 여정을 떠나는 후배들에게 간곡하게 주고 싶은 말이다.
장 덕 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