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지음·이은선 옮김 바다출판사 발행·1만1,800원
'진공 상태에서 종소리가 들릴까, 또 자석은 정상적으로 힘을 발휘할까, 곤충들은 날 수 있을까.'
이처럼 꼬리를 무는 의문에 대해 처음으로 실험을 한 사람은 영국의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1627∼1691)이었다. 300년 뒤 10대의 한 소년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보일이 밀폐용기 내부를 진공상태로 만들기 위해 사용한 공기펌프는 전기 청소기로 대신했다. 실험 결과는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나 자석은 힘을 발휘했으며, 곤충들은 기절하는 바람에 정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화학 반응과 구조에 호기심이 많고, 실험정신이 왕성했던 그 소년은 훗날 전공을 의학으로 바꿔 세계적 신경학 의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로 성공한 올리버 색스(71)이다. '엉클 텅스텐'(원제'Uncle Tungsten')은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기를 과학에 대한 열정으로 보낸 그의 성장기이자, 200년 간의 화학 발전사를 조망한 책이다.
그는 참으로 유별난 유년시절을 보냈다. 우선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특성과 현상에 의문을 품었다. 왜 빛이 나는 걸까, 왜 부드러운 걸까, 왜 딱딱한 걸까, 왜 무거운 걸까, 금빛은 왜 변하지 않는 걸까. 의사인 부모는 자상하게 대답해 주었고, 야금학자, 화학자, 수학자, 물리학자인 삼촌과 이모들은 그의 선생이 됐다. 특히 당시 텅스텐 필라멘트를 갖고 백열전구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던 데이브 삼촌은 금속의 신비한 속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해 '텅스텐 삼촌'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열 살이 되면서 그는 비어 있던 뒷방에 실험실까지 차려놓고 금속과 화학기호 등에 미친 듯 빠져 들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텅스텐 삼촌을 찾아갔고, 지질학 박물관에서 광물의 화학식을 공부하고 원소의 성질을 익혔다. 이렇게 배운 지식은 장난을 치는 데도 요긴하게 활용됐다. '명아주'라는 식물을 소다수에 넣고 증류시켜 게 썩은 냄새가 나는 휘발성 트리메틸아민을 만들고, 이 물질을 생선요리에 몰래 뿌려 먹지 못하게 했다. 또 비중이 물의 4배인 클러리시 용액을 친구들에게 들어보게 해 깜짝 놀라는 모습을 즐기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더듬어 가는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의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만나게 한다. 험프리 데이비(1778∼1829)는 그의 영웅이었다. 데이비는 탄광 내 가스폭발 사고를 막기 위해 안전등을 개발하고, 금보다도 귀했던 알루미늄을 전기분해법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게 했다. 저자는 이때까지만 해도 알루미늄이 귀해 나폴레옹 3세가 손님들에게 금 식기를 쓰게 하고 자신은 알루미늄 식기로 식사를 했다는 일화 등을 소개하며 일상생활과 밀접한 화학 발전사를 추적했다.
화학에 대한 열정은 열 다섯 살이 되면서 식기 시작했다. 그는 이를 두고 '육체의 발기'가 느껴질 즈음, 플로베르가 말한 '이성의 발기'가 사라져갔다고 표현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전자를 파동으로 인식하는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체계가 흔들린 것도 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U V W Y로 시작하는 뉴욕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며 우라늄, 바나듐, 텅스텐, 이트륨 등의 원소기호를 떠올리고 주기율표의 눈금이 맨해튼의 도로망으로 바뀌는 꿈을 꾸고 있다고 한다. 그는 어린 시절 꿈꾸던 화학자가 아니라 의사의 길을 걸었지만, 과학적 상상력과 호기심은 그를 밀리언셀러 작가로 만들었다. 생생한 체험과 해박한 지식, 재치 있는 문장에 빨려 들어 가는 동안 화학은 암기과목이 아니라 실험과목이며 재미있고 신비한 물질의 세계로 안내하는 가이드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저자 올리버 색스는 누구
올리버 색스(사진)는 미국 뉴욕대 의과대학 부교수이자 개업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는 1933년 런던에서 유대인 내과의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61년 미국에 건너가 의학을 전공한 그는 소설 '소생'(원제 'Awakenings')과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원제 'The Man 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유행한 전염병의 일종인 '잠자는 병'에 걸린 환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생'은 90년 로버트 데니로와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 '사랑의 기적'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85년 내놓은 '아내를 모자로…'는 알츠하이머 병과 정신분열증, 정신지체 등의 질환을 가진 환자들의 투병기를 소재로 환자들의 고통 속에서 진지하게 삶의 메시지를 찾으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밖에 신경 관련 질환 등을 통해 인간의 감각, 인식, 기억에 관한 문제를 조명한 그의 책들은 세계 각국에서 번역됐다. 또 대학의 신경과학, 윤리학, 철학, 사회학 강의 교재로 채택됐으며 시학, 다큐멘터리, 드라마, 회화, 영화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가 되고 있다. 영국의 주요 문학상인 호손덴상 등을 받았으며 뉴욕타임스는 문학과 의학을 접목한 그의 활동을 높이 평가해 '의학계의 계관시인'이라고 불렀다. 현재도 낮에는 뉴욕의 병원에서 9·11테러 당시로 정신적 외상을 입은 환자 등을 치료하고, 밤에는 노화, 음악의 힘 등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다.
/최진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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