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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억울한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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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억울한 설날?

입력
2004.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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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다가오면 난 즐겁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사나흘이 되는 휴일동안 온 가족이 모여 담소를 나누며 함께 일하고 함께 휴일을 즐길 수 있어서 즐거운 반면, 차례를 지내는 동안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성차별을 극명하게 경험하기 때문에 유쾌하지 않다.우리는 온 가족이 차례음식을 함께 만든다. 여자들은 재료를 다듬고 씻고 조리하고, 남편의 삼형제들은 전을 부친다. 설거지도 너나 할 것 없이 열심히 한다. 이러한 노동의 참여에 가장 더딘 사람은 70이 넘으신 시아버지셨는데, 지금은 차츰 바뀌셔서 밤도 깎으시고 설거지를 자청하기도 하신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이제 부부동반으로 여가생활을 할 차례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 부부가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커플들을 위해 우리 부부가 임시놀이방 보모가 되기로 하고, 미리 준비한 영화나 연극표를 손에 들려주며, 즐거운 외출을 선사한다. 대신 우리 부부는 아이들이 모두 잠든 뒤 심야영화를 즐긴다. 이렇게 명절을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은 참여와 나눔이다.

우리네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자들은 명절음식을 준비하는데 지쳐서 명절이 노동절이 된다. 그런데 명절노동에서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것은 일 자체라기보다는 일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다. 여자들은 흐르는 땀을 소매 깃으로 훔쳐가며 허리 한번 펴지 못하고 일하는데, 남자들은 방에 틀어박혀 "술 가져와라, 안주 가져와라" 하면서 고스톱을 치거나 텔레비전을 본다면 여기서 오는 피로감은 극대화된다. 몸도 지치고 마음에도 병이 드는 것이다.

많은 경우 남편들이 부엌에서 일을 하고 싶어도 어른들의 눈치가 보여서, 혹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이를 말리는 시어머니의 태도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한다. 결국 남편들은 아내 눈치 보고 어머니 눈치 보면서 몸은 편할지 모르나 마음은 불편한 날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가정에서 온 가족의 참여를 이끌어 낸 사람이 시어머니와 남편이다. 시어머니는 아들만 셋을 키우면서 일손이 부족한 명절에 아들들을 가사노동에 일찌감치 끌어들였으므로 남자가 부엌에서 일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으셨다. 또 우리 남편은 일을 하면서 참여가 늦은 형제들을 끌어들였고, 좀더 즐겁게 명절을 보낼 방도가 없겠는지 궁리하여 문화생활을 하자는 제안을 하여 실천에 옮겼다.

이렇게 가사노동이 남녀사이에 분담되어도 여전히 난 차례를 지낼 때마다 뭔가 억울하고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차례상에서 기념이 되는 분들은 시아버지의 부모님이다. 늙은 며느리이건 젊은 며느리이건 시아버지와 다른 성을 가진 여성들의 부모는 전혀 기억되지도 않고 기념되지도 않는다. 고작 차례가 끝난 후 안부전화를 드리거나 찾아가 인사를 드릴 뿐이다.

차례에 여자들이 참여하여 절을 해도 젯상에 술을 따르는 등 주재하는 사람은 남자들이고, 남계 혈통의 조상만을 기리는 차례를 통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남자위주의 어떤 기념식, 남자의 부모에 대해서만 기리는 기울어진 불평등한 전통을 학습한다. 이러한 기울어진 전통은 여자는 종중의 회원이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을 낳았고, 그 결과 종중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권을 나누는 과정에서도 권리를 인정 받지 못하였다.

명절노동의 남녀분담을 넘어서서 이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명절전통을 어떻게 바꾸어 나갈 수 있을까? 우리사회는 더 늦기 전에 남자의 혈통만을 따지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조상을 기억할 수 있는 양계적 가족제도를 모색하는 계기가 필요하다. 딸과 며느리들을 포함한 모든 가족이 인간답게 대접 받고 조상을 기리는 일이 즐거운 기념식이 되도록 하는 계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린이들의 기울어진 전통학습은 계속될 것이고 양성평등적 가족제도는 실현하기 힘들 것이다.

최 일 숙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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