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여의도 한나라당사 5층 대변인실을 찾으면 한나라당사(史)의 산증인을 만날 수 있다. 아니,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으로 이어진 여당 대변인실 역사의 산증인이라고 해야 맞다. 김숙자(51) 대변인실 부장이다.그가 26일로 32년 당 생활을 마감한다. 미혼의 몸으로 모셔온 노모의 병환이 깊어져 하는 수 없이 사표를 던지게 됐다.
김 부장이 한나라당의 뿌리라 할 공화당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72년. 막 여고를 졸업하고 공채로 공화당 직원으로 취직, 당시 소공동 당사에 갈래머리를 나풀대며 들어선 게 벌써 32년 전 일이다. 지금 그녀보다 더 이전에 근무한 당료는 한나라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김창근 당시 공화당 대변인실의 여비서직이었다. 이후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치며 그녀는 줄곧 '당의 입'들을 가까이서 모셔왔다. "신형식 이해원 박철 오유방 최형철 봉두완 심명보 박희태 강재섭 하순봉 손학규 김철…."
모셨던 대변인을 꼽는 그녀의 손가락이 벌써 모자란다. 30명이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변인을 꼽으랬더니 한참을 망설인다. "다른 분들이 서운해할까봐 말을 못하겠다"고 한참 뜸을 들인 후에야 "손학규 강재섭 대변인이 어려울 때 마음의 힘이 많이 되어줬다"고 말했다. 김철 맹형규 안택수 대변인의 경우 당 출입기자로 인연을 맺었다가 이후에 대변인으로 모신 경우다.
김 부장은 30여년간 늘 그랬듯이 대변인의 공식일정과 방송 신문 인터뷰를 챙기고 각종 자료를 정리하는 일까지 여유 없이 분주하다. "공화당 시절에는 복사기나 팩스가 없어 일일이 신문사에 전화로 논평을 불러주는 게 중요한 일과"였단다.
"하지만 당으로만 보자면 그 시절이 가장 멋있었어요. 일사불란하고 일심동체가 돼 똘똘 뭉친 조직이라 퍽 인상적이었어요." "그 이후로 조금씩 당 조직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그의 말에서는 오랜 당료로서의 냉철함이 엿보인다.
10·26직후 총을 들고 공화당사에 들이닥친 군인들을 보고 놀랐던 기억, 눈이 펄펄 휘날려 마냥 즐겁던 어느 일요일 발표돼 황망하기만 했던 3당합당 소식 등등. 한국 현대 정치사의 굽이굽이를 헤집는 그의 눈빛엔 당을 떠나야하는 아쉬움도 절절이 묻어난다.
한나라당의 입을 옆에서 지켜본 입장에서 기억에 남는 논평을 꼽아보라고 했다. "그게 어디 한 두개인가요"라고 사족을 붙였지만 1988년부터 93년까지 최장수 대변인을 한 박희태 당시 민정당 대변인이 대학생들의 당사 기습점거에 대해 '귀여운 아가들이 당을 방문했다'로 시작하는 여유있는 논평으로 대응하던 것이 가장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신한국당 시절 당직자들의 일괄 사퇴로 시끄러운 상황에서 기자들이 대변인을 붙잡고 논평을 요구하자 '지금은 내부수리중이라 응답할 수 없음'이라고 받아치던 김철 대변인의 순발력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대변인실 경력 32년 김 부장의 말에 대한 철학은 "말은 겸손해야 한다"였다. 막말과 비방, 거짓말이 난무하는 정치판의 말싸움 현장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이의 감회로선 참 단순하면서도 핵심을 찔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