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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쿠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8> 60 그리고 지독한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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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쿠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38> 60 그리고 지독한 우울증

입력
2004.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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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12일은 내가 만으로 예순 살이 되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아주 특별한 환갑을 맞았다. 남들처럼 뭐 떠들썩한 잔치를 한 건 아니었다. 대신 그날 나는 살아오면서 정말 소중했던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때마침 통영에서 국제음악제가 열리고 있었다. 게다가 월간 객석을 운영하는 윤석화가 통영국제음악제의 홍보위원을 맡고 있던 터였다. '좋다, 촌스럽게 잔치 따위를 할 게 아니라 통영에 가자.' 나는 통영국제음악제에 지인들과 함께 참석하는 것으로 환갑 잔치를 대신하려고 마음 먹었다.막상 판을 벌여 놓고 보니 퍽 재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성별, 나이와 관계 없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쭉 적어 나갔다. 차범석, 이병복, 진태옥, 윤석화, 손숙, 강부자, 임영웅, 김정옥 등등…. 쓰다 보니 40명을 훌쩍 넘어갔다. 그들에게는 일일이 전화를 하고 초청장을 띄웠다. 환갑이라는 말은 입도 뻥끗하지 않았다. 대신 놀러 가자, 김포공항에 몇 시까지 모여달라는 이야기만 남겼다. 막상 초청을 해놓고도 과연 몇 명이나 올 지 궁금했다. 약간의 걱정과 흥분이 뒤섞인 상태로 나는 공항에 나갔다. 김포공항에 모인 사람들을 봤을 때 속으로 '내가 참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숙과 임영웅 선생을 빼고는 초청자 전원이 공항에 나왔다.

"이거, 어디 가는 거야?", "갑자기 무슨 여행이야?"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영문을 몰라 했다. 하지만 다들 신나고 재미있는 눈치였다. 모두들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비행기를 타고 통영으로 간 우리는 그날 저녁 정명훈씨와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협연한 음악회에 참석했다. 통영국제음악회장이 박정자 환갑 기념 음악회장으로 돌변해 버린 순간이었다. 음악회에 참석한 뒤 남는 시간에는 통영 주변의 섬들을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뒤늦게 내 환갑임을 안 사람들은 "박정자가 무슨 환갑은 환갑이야, 웃기지도 않아", "야, 역시 박정자답다"고 한마디씩 거들어 내 기쁨은 더했다.

그런데 '호사다마'란 말이 정말 맞는 걸까? 그 즐거운 내 환갑 여행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나는 덜컥 무시무시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숟가락 들 힘도 없을 정도로 기운이 뚝 떨어지더니 갑자기 밥 먹기도 싫고 연극 하기도 싫어졌다. 말 그대로 식음을 전폐하고 그저 이불 속으로만 자꾸 기어들어갔다. 결국 걱정 근심만 파도처럼 밀려 들더니 나중엔 아예 어둠의 심연으로 그냥 꺼져버리고 싶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바로 '우울증'에 걸린 것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때 나는 '대머리 여가수'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내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 빠져 있던 내가 어떻게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결국 한약방과 신경정신과를 차례로 드나들며 치료를 받았다. 생전 받아 본 적이 없는 지압까지 받았다. "뭐가 그렇게 잔뜩 들어 있어요?" 시각 장애인인 지압사는 내 오른쪽 옆구리를 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옆구리가 딱딱하게 뭉쳐있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내 삶의 응어리가 한데 모여있는 것이려니 했다.

그렇게 치료와 지압을 받으며 연극 연습을 했고 마침내 나는 무대에 섰다. '대머리 여가수'는 대사가 복잡하고 많기로 유명한 작품. 그러나 나는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머리 여가수'를 소화했다. 종교처럼 신앙처럼 오로지 믿고 의지하던 연극은 그렇게 만 60에 앓은 우울증을 다스리는 최상의 치료약이 되었다. 그렇게 우울증이 끝났을 때 내 옆구리를 만져봤다. 정말 거짓말처럼 감쪽같이 응어리는 온데 간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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