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은 다같이 고려의 임금을 가까이 모시던 신하이자 높이 오른 벼슬아치였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도 두 사람은 모두 훌륭한 벼슬을 얻었는데, 권근은 제 명에 죽었고 정도전은 자신이 살해 당하였으며 집안도 멸망시켰다."―허균 '정도전권근론(鄭道傳權近論)'
정도전은 경상북도 봉화를 본관으로 하는 향리의 후손이다. 그의 고조인 정공미가 이 지역의 호장을 지냈으며 뒷날 봉화 정씨의 시조가 되는 것을 보면 봉화에 오랫동안 토착 세력으로 살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안동이 관향인 권근은 대대로 명현을 배출한 고려 시대의 중요한 가문 출신이다. 조부인 권부(權溥)만 하더라도 조선의 기반이 될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해 들여온 주인공이다. 권근의 저술로 '입학도설(入學圖說)'을 비롯해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이 있는데, 이것은 가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면서 동시에 당대 조선 유학의 최고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도전, 암담한 현실에서 희망을 보다
둘 사이의 거리는 신분 차이에서만 생긴 게 아니다. 고려 말기는 정치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미묘한 시기였다. 이들이 관직에 진출했을 때 공민왕은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와 친하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등극하자 이인임 일파의 친원(親元) 정책이 다시 불붙었고, 그 와중에서 정도전은 정몽주, 이숭인, 김구용 등과 함께 귀양을 갔다.
2년 간의 나주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4년 동안 고향에 물러나 있다가 이후 경기도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우왕 9년, 함주에 있던 이성계를 찾아가 만날 때까지 정도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도전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고려 최하층민의 삶을 몸으로 경험했다는 사실이다.
위화도 회군 사건은 특히 정도전에게 중요한 변화의 계기였다. 고려 왕조에 대한 절망감과 함께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이 싹튼 시점을 잡으라면 아마도 이 때일 것이다. 동시에 그는 이색(李嗇)을 비롯한 예전의 인물과 소원해지면서 자신만의 길을 걷게 된다.
아무리 암담한 절망의 시대이더라도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그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한다면, 희망은 반드시 찾을 수 있게 마련이다. 정도전은 민중의 거대한 에너지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그는 고려 사회의 말기적 증상을 몸으로 겪었고, 철저한 자기 반성을 거쳐 새로운 사상과 사회를 낳을 씨앗을 잉태했다.
나주에서 귀양살이할 때 지은 일련의 글에서 정도전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처절한 자기 반성을 보여준다. '농부에게 답함(答田夫)'이나 '금남야인(錦南野人)' '가난(家難)' 등이 대표적이다.
'금남야인'에서 '선비(儒)'에 대한 통념을 제시한 후 금남의 시골 사람을 내세워 그것을 통박한다거나, '가난'에서 아내가 집안을 근심하듯 남편인 선비는 나라를 근심하고 성패나 영욕, 득실은 하늘이 주는 것이라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는 등의 내용에서 정도전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나주 생활은 정도전의 몸을 힘들게 했지만 자기 반성과 함께 민중의 에너지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새 세계를 만들어나갈 희망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는 이성계를 만난 후 자신의 생각을 현실로 옮김으로써 조선이라는 나라를 계획한다. 왕의 추대에도 적극적이었고, 예악전장(禮樂典章)과 제도문물(制度文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는 언제나 과감한 결정과 힘찬 추진력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선봉에 섰다. 그는 혁명가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개국 일등공신이었다.
권근, 혁명을 딛고 일어서다
권근의 존재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 말 암담한 현실은 그를 아예 은거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다시 정계에 복귀한 것은 조선이 세워진 이듬해였다.
일찌감치 조선 건국에 참여한 정도전과 건국 이후에 참여한 권근의 비중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실적으로도 정도전은 이미 개국 일등공신으로 책봉돼 최고의 권력과 특혜를 누리며 국정 전반을 주도하고 있었다. 반면 권근은 태조 5년 명나라와 외교 문제가 발생하자 자원해서 중국까지 가서 해결한다. 외교문서 때문에 명나라와 문제가 발생하자 정도전이 군사를 동원해 전쟁을 벌이자고 주장한 것과 여실히 비교된다. 그 덕에 권근은 태조 6년에야 비로소 원종공신(原從功臣) 제4등에 봉해졌다.
권근이 정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한 것은 정도전의 피살이라는 충격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 정도전이 살해되자 권근은 즉시 정당문학(政堂文學),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내며 정치 역량을 발휘하게 된다. 정도전이 맡았던 직임을 그대로 물려받아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조선 건설의 두 방향
정도전과 권근은 언제나 같은 영역에서 국정을 수행했다. 악장(樂章)을 짓고 법전을 손질해 예악과 제도를 정비했으며, 조선의 이념 방향을 결정하는 유교적 성과를 내놓았고, 불교를 이념적으로 비판했다. 두 사람은 새 나라 조선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일을 도맡아 해냈다.
그러나 세부적인 면에서 둘의 차이는 크다. 초기 악장 제정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정도전은 언제나 문무(文武)를 동시에 언급하지만 권근은 주로 문(文)에 주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한다. 이성계는 뛰어난 용맹과 전쟁 수행 능력을 갖춘 인물이어야 했고, 동시에 덕치(德治)를 펼칠 수 있는 성군으로 묘사돼야 했다. 그 순간 이성계라는 인간은 영웅으로 바뀐다.
정도전의 비극은 바로 거기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조선은 이미 성인을 가지게 됐고, 그 순간 혁명가 정도전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비극적 죽음까지도 그가 해내야 할 역할의 일부였던 것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정도전의 죽음을 통해서 이성계와 조선이라고 하는 나라는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이미 모든 준비를 해놓은 상태에서 바통을 이어받은 사람이 권근이다. 물론 권근이 요행수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그는 충분한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건국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 큰 일을 마무리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권근은 조선을 어떻게 하면 안정된 체제로 끌고 갈 것인가 고민해야 했다.
건국이 마무리되면 다음은 수성(守成)이다. 무력을 강조하는 것은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 쉽다. 이 때문에 권근의 논리 체계에서는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영웅의 이미지는 사라졌고, 문아(文雅)한 이미지의 임금이 등장했다. 글쓰기에서 정도전이 철저히 유학에 바탕해 도리를 전하는 것을 앞세웠다면, 권근은 국가의 위엄을 장엄하게 드러내줄 화려하면서도 우아한 태도를 중시했다. 정도전이 현실적 영향력과 힘을 갖고 있던 불교를 비판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 것과 달리 권근은 유학의 얼개를 짜고 그것을 튼실히 하는 데 주력했다.
역사는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나
정도전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그가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현하려고 애썼다는 점에 집중되고 있다. 반면 권근의 유교적 논의가 조선 전기를 지배한 것에서 우리는 정치적 담론이 이념화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예악 제도의 측면에서는 정도전의 영향이 절대적이었지만, 이념적 측면에서는 권근이 기초를 마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성리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두 사람을 업적에 걸맞게 평가하지 못했다. 허균이 지적한 대로 정도전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것도, 권근이 제명대로 살다가 간 것도 모두 개인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두 사람 모두 드넓은 역사의 벌판에 새로운 길을 내면서 나아갔으며,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역사 현실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김 풍 기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정도전
호는 삼봉(三峰). 1337년에 태어나 공민왕 때 벼슬을 시작, 개혁 세력의 일원이 됐다. 후에 친원파(親元派)에 의해 나주 귀양을 가기도 한다.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조선의 예악 제도에 관한 대부분의 문헌을 정리해 조선의 큰 틀을 만들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1389년 이방원(태종)에게 살해됐다.
권근
호는 양촌(陽村). 1352년에 출생, 공민왕 때 벼슬길에 나아갔으나 고려의 권신들을 비판하다가 여러 차례 귀양을 갔다. 조선 건국 이듬해 벼슬에 다시 나아갔으며 명나라와 표전(表箋) 문제가 불거졌을 때 자청해서 사신으로 가서 해결하고 돌아왔다. 1409년에 숨졌다. 유학의 체계를 정리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 16세기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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