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원의 검진 결과를 전화로 알았다.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한다. 더욱 조심하라는 뜻으로 들렸다. 강형룡 박사께 처가 내용을 아뢰었다. 처에 의하면 7월초 늑막에서 물을 1,500㏄ 빼던 날, 처에게 전화를 걸어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강 박사가 이혁상 박사의 진료 결과를 듣고 나름대로 '정리하여' 하신 말씀이었다."(2002년 10월4일)병원에서는 생명의 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통보했다. 그런데도 정작 본인은 달리 받아들였다. 밝고 낙천적인 심성에 훈훈해지면서도 닥쳐오는 죽음이 안타깝게 느껴진다.
소설가 이문구(1941∼2003·사진)씨의 1주기를 맞아 그의 투병일기를 묶은 '그리운 이문구'(중앙M&B 발행)가 나왔다. 위암 수술을 받은 2001년부터 2년 여 동안의 기록에 담긴 작가의 마지막 삶은 다가오는 죽음에 쫓기지 않고, 단출하고 여유롭다.
그는 1977년부터 두꺼운 대학노트와 업무용 다이어리 등에 짤막한 메모 형식의 일기를 썼으며, 10여 권의 '일기 메모'는 2003년 1월8일 끝났다. 성심껏 기치료를 해주는 소설가 송기원씨의 마음 씀씀이에 편안해 하고, 청주시 법원 관사의 박씨에게서 주먹만한 상황버섯을 받고는 감사해 하며 '평생 기억하고 싶은 날'이라고 쓴다.
월드컵 대회를 시청하고 "축구가 곧 인생이다. 축구도 공 팔자(八字) 놀음이 아닌가 생각을 하였다"면서, "공은 둥글다. 둥근 팔자는 행처무정(行處無定) 아닌가?"라고 무욕의 인생관을 드러낸다. 한국의 선전에 기뻐하고 흥분하면서 '꿈의 16강'에 진출하고 '꿈 속의 8강'에 진입하고 '꿈 밖의 4강'에 등정했다고 적는다. 작가다운 말 쓰임새다.
9·11 테러에 대해서는 "세계의 경찰국가요 재무국가인 미국의 허상이다. 파괴된 자존심과 엄청난 유혈량으로 보아 반드시 (전쟁을) 감행할 것이므로, 제2의 중동전 규모의 전화(戰火)는 불가피할 전망"이라고 내다보고, 대통령 선거 직후 "이씨 역시 자질이 충분하고 신뢰가 가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씨는 당내 주변, 측근에 포진하고 있는 구시대 정객들에 대한 식상한 민심과 수구세력, 특히 고교 교장 같은 무미건조한 미래 없는 남성상을 고수하다가 실패를 자초한 것이었다"고 지적하는 글 등에서 날카로운 현실 인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작가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나는 늘 타인의 힘으로 살아왔거니와 그 타인의 힘 너머에는 감히 추측할 수 없는 신비의 조화가 늘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금 확인하는 바이다"고 털어놓았듯 동료, 선후배 문인들과 따뜻하게 교류한 그의 삶도 일기 속에서 만져진다. 그 문우들인 박태순 한승원 황석영 김정환씨 등이 이문구의 삶과 문학을 회고한 글이 함께 묶였다.
/김지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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