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래 전에 회사를 그만 둔 신문사 선배가 지난해말 소설을 냈다. '자향'(子香·전 5권, 소담 발행)이란 장편역사소설로 처음에는 유난히 박학다식, 박람강기(博覽强記)했던 선배의 이야기 솜씨가 궁금해서 손에 들었다가 놓지 못하고 다 읽어버렸다. 그만큼 재미가 있었다.조선 중종때 기묘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비로 몸이 떨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친, 아름답고 똑똑한 열 여섯 살 양반 규수 자향이 주인공이지만 그 주변의 수많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처럼 작가의 따스한 눈길을 받고 있다. 특히 등장인물 대부분이 하급관리나 중인, 상놈이어서 소설 전체가 무지렁이 민초들에게 바치는 서사시다.
서민들의 삶을 진솔하게 그리되 흔한 선악의 잣대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은 점도 신선하다. 짧고 섬세한 문장, 뛰어난 묘사 등이 글의 재미를 더하지만 무엇보다도 기문둔갑과 상승무공 등 '무협 코드'를 넓고 깊게 활용한 것이 재미를 두드러지게 한다. 부평초를 딛고 강을 건너고(登萍渡水), 눈을 밟아도 발자국이 남지 않는(踏雪無痕) 식은 아니지만 TV의 역사 드라마에서 보는 사실적 무예와는 비교할 수 없이 폭 넓은 상상력에 기댄 무술 세계가 펼쳐진다.
막 '자향'을 덮자 이번에는 진융(金庸)의 '사조영웅전'(射 周鳥英雄傳·전8권, 김영사 발행)이 손에 잡혔다. 그 동안 여러 시리즈가 나온 진융의 무협소설이지만 정식 계약을 통해서는 처음 나온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80년대 초까지 한 10년 간 거의 모든 무협지를 읽었지만 진융의 작품이 소개될 무렵부터 무협지를 '끊은' 탓에 접하지 못했던 그의 작품을 들고 모처럼 추억에 젖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양한 '매트릭스 읽기' 저술이 쏟아지는 등 우리 문화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영화 '매트릭스' 1, 2편을 DVD로 다시 보면서 처음 영화를 보며 느꼈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닌 현대판 무협지였다. 혹자는 '무협 코드'를 컴퓨터시대의 가상 현실과 접목한 것을 영화 성공의 비결로 지적했지만 따지고 보면 무협지는 언제나 가상 공간을 그려왔지 않은가. 더러 '역사무협'이란 꼬리표를 달기 위해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깔지만 영웅·협사의 활동 무대인 강호나 중원 무림 자체가 현실과는 별도의 접속구를 필요로 하는 가상공간 아니던가. 그러고 보니 연말연시를 꼬박 무협 코드 속에서 지낸 셈이다.
과거 초라한 대본용 책으로 나왔던 무협지가 이제는 다른 책들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 지질과 장정으로 나온다. 주류문화의 바깥에 머물던 것이 이제는 주류문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안쪽으로 파고 든다. 현실성과 상상력의 두 축 사이에서 상상력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었던 결정적 약점이 인터넷 시대를 맞아 오히려 장점으로 바뀌고 있다. 비교적 단순한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구도와 영웅주의 등은 컴퓨터 게임 캐릭터에 익숙한 세대에게는 더욱 큰 매력일 수 있다.
그러나 70년대 숨막히던 시절,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에서 와룡생(臥龍生)에서 야설록에 이르기까지 온갖 무협지를 뒤적일 때 그랬듯 무협 코드는 음험한 시대의 냄새를 풍긴다. 숨막히고 답답한 현실이 별유천지에서 노니는 맛을 보탰다. 지금 성행하는 무협 코드에는 그런 냄새가 없을까. 하급 무인들의 드잡이 질을 연상시키는 정치갈등만 무성한 현실은 올 한해 무협 코드의 범람을 예고하고 있는데도.
황 영 식 문화부장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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