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김영삼 정권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의해 전직 대통령인 노태우가 구속되던 날, 한 야당 대변인은 "헌정 사상 가장 불행한 날"이라고 논평했다. 이에 대해 나는 헌정사상 가장 불행한 날은 노태우 등 신군부가 광주시민들을 살육했던 1980년 5월 18일이었고, 그가 구속된 날은 뒤늦게나마 법이 서기 시작한 "헌정 사상 가장 다행한 날"이라는 평론을 쓴 바 있다.며칠 전 임시국회가 끝나면서, 그동안 방탄국회 덕분에 법망을 피해온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구속되어 감옥에 갇혔다. 국민의 대표들이 같은 날 이처럼 줄줄이, 그것도 모두다 비리혐의로, 감옥행을 한 것은 유례가 없다는 점에서, 이날 역시 헌정 사상 가장 불행한 날 중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이 아닌 것 같다. 즉, 과연 과거보다 현재의 정치권이 더 부패해서 이처럼 같은 날 줄줄이 감옥을 갔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대선자금만 해도 트럭떼기로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지만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엄청나게 깨끗해진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감옥을 가고 있는 것은 정치권이 과거에 비해 오히려 상대적으로는 깨끗해졌지만, 정치권의 부정부패에 대한 사회적 용인도가 훨씬 더 엄격해지고, 정치권에 대한 검찰의 독립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국회의원들이 줄줄이 감옥을 간 날은 헌정사상 가장 불행한 날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다행한 날 중의 하나로 기억돼야 한다.
여하튼 정치권의 연이은 비리사건은 오는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낡은 정치권에 대한 대대적인 물갈이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감지한 정치권은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위기의식에서 경쟁적으로 물갈이에 나서고 있다. 특히 대선자금 문제를 통해 가장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는 한나라당의 경우 강력한 내부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지도부가 5, 6공 인사들의 물갈이론을 주장하고 나서는 등 강도 높은 물갈이를 추진하고 있다. 이는 현역의원 중 무려 22명이 총선 불출마와 정계은퇴를 선언한 것이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11일 열린 우리당의 당대표로 50대 초반의 정동영 의원이 선출됨에 따라 물갈이와 세대교체의 바람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같은 물갈이 속에서도 낡은 색깔론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한나라당의 홍사덕 원내총무가 얼마 전 뜬금없이 우리사회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호감을 가진 세력이 상당히 존재하는 바, 이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세력이라는 색깔시비를 하고 나선 것이다.
한마디로, 한나라당에 따라다니는 '부패원조당'과 낡은 '골보수당'이라는 두 개의 부정적인 이미지 중 전자는 고치는 시늉을 하면서도 후자에 대해서는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낡은 매카시즘이 한나라당이 추구하는 정체성이라면, 5, 6공인사들을 김일성 지지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온 애국투사들로 더욱 우대해야지, 왜 거꾸로 물갈이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이처럼 당지도부가 어처구니 없는 색깔론을 펴고 나서자, 5, 6공 용퇴론의 상징적 표적으로 거론되어 온 김용갑 의원 같은 사람조차도 "남한의 보수세력을 죽이려는 북한이 1번 타깃으로 나를 지목하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기분 나쁘다고 불출마를 선언하면 김정일을 돕는 것"이라는 기이한 논리를 내세워 용퇴론에 반발하고 나섰다.
물론 세대교체와 물갈이는 필요하고 시대적 대세이다. 그러나 국민들이 한나라당에게 바라는 것, 한나라당이 21세기 보수정당으로 살아 남는 길은 낡은 5, 6공 색깔론을 신세대 색깔론으로, 50∼60대 골보수를 30∼40대 신세대 골보수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시대는 변했다.
서강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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