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삶에 대해 한 순간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때때로 괴로웠던 시간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 괴로움은 한시도 내가 무대를 떠날 수 없었다는 데서 비롯했다. 이병복 선생이 붙여준 '기관차'라는 별명처럼 나는 연극이라는 철로를 쉴새 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적어도 정거장에서는 멈춰 서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나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1986년 8월의 일이었다. '위기의 여자'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를 만큼 롱런하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월요일 하루를 쉴 뿐 주 6일을 공연하는데 수요일과 토, 일요일 그리고 공휴일에는 하루 2회를 했다. 그래도 관객은 끊일 줄 모르고 밀려들었다. 나는 피곤한 줄도 몰랐다. 그저 찾아 주는 관객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덕에 없는 기운까지 쥐어짜며 공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내가 몸담고 있던 극단 자유가 아닌 산울림에 객원 출연하는 상태였다. 66년 창단한 극단자유에서 자랐고 거기에 내 청춘을 다 바쳤다. 그래서 '위기의 여자'를 하는 동안 내내 극단 자유에 미안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위기의 여자'를 하던 그 해는 자유 창단 20주년인 해였다. 일본 공연을 예정하고 준비한 '이름없는 꽃은 바람에 지고'에는 안숙선, 국수호, 유인촌 등 많은 외부 게스트를 초청해 놓고 있었다. 또 한편으론 창단 20주년 기념 공연으로 문예회관에서 막을 올린 최인훈 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도 함께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온달의 어머니 역을 했던 이 작품은 내 대표작 중의 하나였다.
자유는 그 두 작품을 해야 하는데 나는 계속 '위기의 여자'를 해야 했다. '위기의 여자'가 공전의 히트를 치고 있는데 배우가 도중하차해야 할 사정이 생기니 산울림으로서도 난처했다. 극단 자유와 산울림 어느 한쪽도 나를 두고 양보를 하려 들지 않았다.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연출자나 다른 스태프는 자리를 비우고 이쪽 저쪽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배우는 무대에 서는 사람이다. 배우가 무대에 있지 않으면 막을 올릴 수 없고, 무대를 떠나지 않는 한 막을 내릴 수도 없다. 공연 중인 배우는 아플 권리도 슬플 권리도 없다. 그런 배우를 어느 한 쪽도 놓아 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사지를 찢기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그 줄다리기에서 내가 얼마나 마음이 다칠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배우 노릇 한번 고달팠다. 그때 나는 내가 배우가 아니라면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뼈저리게 느꼈다. 배우는 아무도 구해줄 수 없다는 걸. 그러나 나는 그들 사이가 나빠지지 않을까 그것에만 전전긍긍했다. 결국 산울림의 주장대로 '위기의 여자' 연장 공연을 하면서 극단 자유의 20주년 기념작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괘씸죄에 걸린 나는 일방적으로 극단 자유의 해외 공연 팀에서 빠졌다. 그건 일종의 축출이나 마찬가지였다. 난 불쾌했다. "좋다!" 그 뒤 연습실에서 김정옥씨와 마주쳤을 때 둘의 표정은 있는 대로 험악해졌다. 극단 자유의 후배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불화는 아주 드라마틱한 화해로 끝났다. "역시, 무대 위에서 당신은 빛난다." 문예회관에서 막 오른 '어디서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보고 김정옥씨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동숭동 샘터 빌딩에 있는 밀다원에서였다. 그러면서 어떤 배역이건 일본 가는 공연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의 제의가 고마웠다. 연출자와 배우는 그렇게 만나야 했다. 한 동안 그를 미워했던 마음과 자잘한 상처들이 한 순간에 치유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외쳤다. '연극배우 박정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이라면 얼마든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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