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개방되지 않은 중국 환런(桓仁)을 찾아가서 고구려의 첫 도읍을 대한 지 벌써 14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수없이 많이 답사했지만 지난해 10월 말 답사는 꼭 보고 싶은 개봉영화를 기다리듯 특별히 가슴이 뛰었다. 중국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 유적을 전면 발굴·정비하느라 폐쇄했다가 재개방한 이후 처음 찾아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언제 봐도 가슴 뭉클한 오녀산성
댐을 지나 나지막한 산 위에 올라서자 멀리 산꼭대기에 항공모함처럼 솟아있는 오녀산성이 한꺼번에 나타난다. 아! 오녀산,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신비한 자태에 가슴이 뭉클하다. 예상했던 대로 우선 입구부터 크게 달라졌다. 국가급 관광지라는 별 4개 짜리 간판이 붙고 입장료도 내외국인이 50위안(7,500원)으로 같아졌다.
정상에 오르는 수단 중 하나인 짐 운반용 리프트도 없어졌다. 원래는 위험해서 사람이 타지 못하는 것이었지만 1991년부터 수없이 탔던 추억의 통이다. 대신 938m 돌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숨이 턱에 차서 계단을 올라 산성 서쪽 문에 다다르니 처음 보는 성문이 앞을 가로막아 선다. 몇 년 전 발굴할 때 주춧돌까지 가져가 버려 형체를 알 수 없었던 성문을 모두 복원해 놓아 초입부터 즐거운 볼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성은 우선 양쪽 석벽을 재현하고 발굴할 때 출토된 대문 돌확 두 개를 제자리에 설치했다. 문안에 초소로 보이는 시설을 마치 홈을 판 것처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주춧돌 위는 투명 플라스틱으로 덮고, 발굴한 곳 위에는 나무판을 올려놓아 훼손되지 않게 세심하게 배려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 다시 가져가 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뚜껑을 잠깐 열고 사진 한 장을 찍는데 갑자기 물건 파는 아주머니들이 몰려들어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당신 이 고장 사람 아니죠?" 하며 다그쳤다. 하기야 이 고장 사람이 누가 뚜껑을 열고 사진을 찍을 만큼 깊은 관심을 가지겠는가? 함께 간 현지인이 사태를 수습해 어려움에서 벗어났지만 부릅뜬 아낙네들의 눈초리는 답사 내내 뒤통수를 따라 다녔다.
대형 집터와 병영 주거지 발굴·정비
오녀산 위를 걸으면 언제나 한가로운 마음에 2,000년 전 고구려 시대로 되돌아간다. 1991년 처음 왔을 때는 전체 820m에 정상 부근만 100m 높이로 솟아오른 철벽 요새 안에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고 커다란 우물이 남아 있는 데 놀랐던 기억이 새롭다. 이제는 발굴이 많이 진행돼 고구려 첫 도읍의 윤곽이 뚜렷하다. 도깨비 뿔처럼 솟아있던 텔레비전 송신탑을 철거한 것을 보니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하느라고 꽤나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제 나는 오녀산성을 눈 감고도 찾아 다닐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저기 낯선 시설물들이 눈에 띄어 마음이 바빠졌다. 맨 먼저 나타나야 할 '왕궁터'란 표지판은 '대형 집터 1호'로 바뀌었다. 3년 전 발굴을 마치고 관광객을 끌기 위해 '왕궁터'라는 표지판을 붙였으나 세계문화유산를 심사할 때 '진위 문제(authenticity)'를 중요하게 다루기 때문에 바꾼 것이다. 그러나 표지판에는 여전히 왕궁일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3,000명의 군사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대형 샘터를 지나면 또 다시 발굴터가 이어진다. 창고로 보이는 대형 주거지와 병영으로 보이는 20여 곳의 살림집이 바로 나타난다. 병영은 모두 쪽구들을 놓아 온돌이 생활화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번 곡식 창고터라고 했던 대형 주거지를 전면 발굴해 창고 주변의 배수관을 밝혀낸 것이 이번 발굴의 큰 성과로 보였다. 눈비에 원형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 유적 위에 투명유리로 덮은 건물을 지었다.
병영터를 지나면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이며 고구려 비류수(현재 혼강)가 눈 안에 가득 들어온다. 서쪽 끝에 온 것이다. 옛날 고구려 장수가 지휘했다는 장대(將臺)에 아스라한 운무가 가득해 신비감을 더해 준다. 평소에는 장대를 보고 나면 동쪽 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순서였다. 그런데 작은 장대에서 얼마 안 가 또 다시 발굴터가 나왔다.
동벽 등 성벽 곳곳도 재정비
"아니, 이런 곳에 건물터가 있다니!" 그것도 대형 건물터였다. 서쪽에 높이 4m 정도의 암벽이 있고 암벽 밑에는 황토로 돋았는데 바닥에는 동서로 가지런히 10개씩 3줄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아있다. 산꼭대기에서 암벽을 바람막이로 쓴 슬기가 돋보인다.
동쪽 절벽 사이로 빠져 나오는 계단도 잘 정비해 어렵지 않게 동쪽에 있는 성벽에 도착하였다. 내려오자마자 잘 복원된 성벽에 다다랐다. 예전에는 완전히 무너져 돌무더기밖에 없었는데 깨끗이 복원됐다. 성벽 밑에 심은 밀은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겨울맞이를 하고 있었다. 중국 당국이 급하게 복원하느라 잔디 심을 여유가 없어 대신 밀을 심어 환경정리를 했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신청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 만했다.
동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성벽을 보수했고, 성벽 위 성가퀴 안에 1m 간격으로 파놓은 돌구덩이와 구덩이에 나무기둥을 박아 울타리와 깃발을 세웠던 것도 전부 철거했다. 역사적으로 밝힐 수 없는 것은 모두 제거해 심사에 철저하게 대비한 노력이 곳곳에 보인다. 동벽에서 가장 값진 것은 계곡 사이 밖으로 튀어나온 언덕 위에서 초소들이 많이 발굴됐다는 것이다. 이것도 이번에 처음 보는 것이다. 모두 네모꼴에 반지하식이고 쪽구들을 설치한 게 특징이다.
남문을 지나 성을 내려오면서 머지 않아 다시 한 번 올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실제로 두 달 뒤인 12월29일 답사단과 함께 다시 오녀산성을 찾았다. 그러나 중국 당국이 철저하게 봉쇄해 입구에도 가보지 못하고 멀리서 겉모습만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고구려 유적 보겠다고 한국에서 환런까지 답사단을 인솔해 갔는데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중국은 늘 그렇게 불확실했다.
서 길 수 고구려연구회장 서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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