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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장흥 탐진댐 인근 새 보금자리 "우리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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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에선]장흥 탐진댐 인근 새 보금자리 "우리동네"

입력
2004.01.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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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댁(77) 할머니가 저녁 찬거리로 상추를 솎느라 낯짝만한 하우스 텃밭에 코를 박고 앉았다. 아랫마을 신풍리에서 일 봐주러 온 마정댁(63)이 거들고 나선다. "회관서 저녁에 편 먹기 민화투 함서 쌈 싸묵게 몇 손 뜯어 갈라요." 내색은 않지만 유치댁 마음은 아릿하다. 농한기 아닌가. 팔월 공산이 뭔지도 모르는 유치댁이라고 동무들끼리 모여 놀던 섣달 저녁 화투농사 재미까지 모를 리 없다. "아따, 그거 만지지 말어. 재미들믄 사람베링게." 유치댁은 일 맛을 잃은 듯, 애먼 화투에다 퉁바리를 놓고 손을 턴다. 그리곤 근래 습관처럼 돼버린 혼잣말이다. "덕산떡(댁)은 서울 손주네 가불고, 갑골떡도 골골해쌌더마 그예 병원가고, 심심해 죽겄어." 그는 재산목록 1호로 정한 '누렁이' 밥사발 곁으로 걸음을 뗀다. 새 봄에 한 배 새끼 본 뒤에 장에 팔아 동무들과 '목구멍 타작'에 나설 참이라며 웃던 그 개다. 전남 장흥군 유치면 조양3구 '우리동네'. 오갈 데 없는 탐진댐 수몰 실향민 여덟 명이 모여 사는, 대지 1,000평 건평 80평의, 하늘아래 가장 작은 '마을'이다. 유치댁은 '우리동네'에 든 지 만 1년을 채운 원년 토박이. "그냥 집인디 왜 동네냐고? 아따, 들어와봐. 알게 될팅게." 손목을 잡아 끈다.옴팡한 마을 자리가 댐 앉히기엔 딱이라는 말은 마을 고로(古老)들이 깨복쟁이 시절서부터 듣고 자란 말이었단다. 하물며 '그 징한 왜놈'들이 측량까지 해뒀다는 얘기도 있었다니까. 그게 해방이 되고, 혁명인지 쿠데탄지가 몇 번이 반복되는 세월에도 잠잠하던 것인데, 귀동냥 잰 이들 말을 옮기자면 그런 것도 아니어서, 잊혀질 만 하면 한 번씩은 꼭 구멍 난 양말에 발가락 불거지듯 댐, 댐 했다고도 한다.

그 말 많던 '탐진 다목적댐 건설' 공고가 나붙은 것은 1996년 12월말. 전남 장흥군 유치면 14개 법정리 가운데 7개가 수몰지구로 고시되고, 12개 자연부락 700여 가구의 보상 협상이 시작됐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옆집 밭에 콩이 나는지 메주가 나는지도 모르쇠 대던 이들조차 보상이며 이주대책을 입 방아에 올릴 만큼 풍문에 젖을 대로 젖어있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데모? 솔찬히 했제. 헌디, 허믄 뭐해. 핑생을 땅 갈고 살아봐도 그 밥에 그 나물인디." 도회지 아들네 성화에 못 이겨, 당장의 목돈 욕심에, 농사가 징글맞던 참이라, 등등의 이유로 도장을 찍는 주민들이 늘어갔다. 어제 보상협상이 끝났다 싶으면 오늘같이 포크레인이 달려와 집 뿌리까지 파내버리니 마을의 그림 같던 구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지 굳게 내 자리 지킨다며 앙다짐하던 이들의 마음조차 포크레인만 들어오면 흔들리더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의 아버지들서부터 다져왔을 마을은 불과 3년여 만에 쑥대밭으로 변했고,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다목적'을 앞세운 댐의 명분과 살벌한 자본의 논리 앞에 '내 땅에서 내 식대로'의 소박한 바람은 안쓰럽도록 무기력했다. 장흥 읍내를 지나 유치면 들머리 고개(빈재)를 넘어서면 늘 그렇게 앉아 있던 대리마을도, 논이 푸지기로 유명짜하던 단산마을도 흔적없이 사라졌고, 가장 번화했던 송정리도 면사무소 앞 뜰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와 유치초등학교터 팽나무 두어 그루로 남았다. 10월이면 물이 든다는 마을 자리는 보상시비에 얽혀 안 뜯긴 몇몇 집과 뜯길 날 받아놓은 퀭한 국도 23호선마저 없었다면 삶의 흔적조차 찾기 힘든 벌판이었다.

지난 총선때 '6만 사수'를 외치던 군 인구가 4만명 대로 줄어 이제는 '5만 사수'를 구호로 삼는 판이니 군에서는 한 명이라도 수몰민을 붙들어야 할 판. 5가구 이상 거주시 택지를 닦아준다며 조례를 제정했다. 보상비와 이주대책비 받아 조합 빚 갚고, 아들 딸네 살림에 몇 푼씩 보태주고 남은 돈으로, 그래도 고향이라며 눌러앉은 이들이 터를 잡아 세운 마을이 댐 상류 수몰선 바깥의 비(非)자연부락 '원등리'다. 그리고 '우리동네'는 원등리에서도 상촌 골짜기를 타고 자동차로 10분은 올라가야 나타난다. "쩌어기 지단하게 선게 우리동네지라." '우리동네'는 상촌1구 이장하던 화상 장애인 문주남(46)씨가 수몰 보상비를 탈탈 털어 지난 해 지은, 붉은 벽돌집이다. "방을 여덟 개 넣고, 사무실로 하나를 쓰고나니 딱 7개가 됩디다.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하나씩 얹은 거요." 딴은 방방이 붙은 아크릴 문패에는 대리, 단산, 송정, 늑룡, 용문, 덕산, 오복리 등 수몰될 7개 마을 이름들이 적혀있다.

땅께나 있는 가구야 억대 보상도 우스웠다지만 군유지에 무허가로 집 짓고 살면서 기댈만한 피붙이 하나 없는 이들도 적지 않았던 터다. 그들을 위한 보금자리로 선 것이 우리동네인 셈인데, 군에서도 뾰족한 대책이 없었고 수자원공사에서도 규정 보상이 끝난 마당이니 나몰라라 하던 난제를 문씨가 나서 짊어진 것이다. 군은 대신 산자락 깎아 집 지을 때 취로사업 일손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면 직원 봉사모임 회원들은 갹출한 돈으로 '우리동네' 안내 입간판 두 개와 커튼을 기증했다.

'이장'은 당연히 문씨가 맡았고, 마음병을 앓고 있는 문천(40)씨가 총무다. 자원봉사자 몇몇과 함께 남자들이 농사와 염소 15마리 표고목 3,000개를 돌보는 바깥 일을 주로 한다. 많을 때는 10명까지 머물던 연로한 주민들은 대체로 집안일을 맡는다. 밭 600평 논 900평에서 풀도 매고, 채소도 가꾸며 지난 한 해를 보냈다. "연말 결산을 했더니 1,800만원 지출에 1,700만원 수입입디다." 쌀은 기부자들이 도와줬고, 대식구가 알뜰하게 살았지만 전기세에 영농자재비 지출로 적자가 난 것이다.

문씨의 목표는 5년 내 자립기반 구축이다. "후원금이야 안 주믄 끝이거든. 돌라고 손 벌릴 수도 없고." 다른 곳에 손 안 벌리고, 우리 힘으로 '우리 동네'를 지키겠다는 각오다. 올부터는 표고목을 더 들여 주업으로 삼고, 축사를 지어 닭도 키워 볼 계획이다. 계란도 팔고 먹고, 여름에는 어르신들 보신용으로 한 마리씩 잡기도 할 참이라고 했다. "여름에 다시 올라요? 실한 놈으로 한 마리 안칠 참잉게."

/장흥=글·사진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20년전 큰 화상… 고향품서 재기/"우리동네" 지은 문주남씨

꼭 20년 전이다. 군대 마치고, 모 공기업 취직시험에도 합격했던 인물 좋은 문주남(사진)씨가 얼굴부터 가슴까지 3도, 35% 화상을 입은 것이다.

누나 가게에서 당한 일이니 어디 하소연 할 데도 없었다. "딱 2년 병원서 죽다살다 하다 봉게 애인이고 직장이고 돈이고 하나도 안남습디다." 흉하게 변한 얼굴을 고향 친구들에게 보이기 싫어 죽을 때까지 고향을 등질 참이었다. 하지만, 실한 아들의 사고소식을 듣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귀향했다. 그 때가 서른 즈음이었다.

좌절도 했고 몹쓸 마음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살려보자고 간병해준 가족이 있었고, 눈맞춰 웃어주며 등 두드려주는 고향 사람들이 있어 그는 다시 설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말을 않지만, 그래서 '우리동네'도 짓게 된 것일 게다. 시설이 빈약해 사회복지시설 인가도 안 난다고 한다. 제 돈으로 집 짓고 오붓이 사는데 시비를 삼을 사람이 있으랴만 그는 유치면장 등 기관장을 '우리동네' 자문위원으로, 부녀회장과 번영회장을 '명예감사'로 위촉, 스스로 시비거리의 근거를 만들어뒀다. 늘 일을 만들고 벌이는 천성이라 지금껏 신관은 팍팍했다지만 외로워본 적은 별로 없던 문씨다. 우리동네는 올해도 참 바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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