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몇몇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삼팔선은 넘었고, 사오정은 되지 않은 어정쩡한 나이, 일생을 두고 가장 열심히 살아야 하는 시기를 맞았지만 그만큼 회의도 많아 모두 살아가는 일이 만만치 않은 모양입니다.경제, 교육, 정치 등 남들이 하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거쳐 마지막에는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며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주장과 '경쟁 사회는 서로 얻고 기댈 것도 없이 남을 눌러야 살아 남는 사회다'라는 견해가 부닥쳤습니다. 결국 그날의 결론은 '좋은 뜻을 가진 일에는 좋은 사람들이 모이니 세상적인 것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조금씩 버리고 생각을 전환하자'는 것으로 맺어졌습니다.
나무들도 풀들도 어려움을 겪으며, 좋고 많은 열매를 만들어 퍼뜨리고 살아가야 하는 목표가 있지만 모든 것을 다 쉽게 얻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 선택과 적응의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방법과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의 대지를 가장 먼저 차지하며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에는 좀 더 특별한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앉은부채에게는 얼었던 땅이 녹기 무섭게 손가락 하나 길이 만큼 되는 꽃을 피우기 위해 땅속에 1m가 넘는 뿌리를 박아 근간을 튼튼히 하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또 화려한 꽃잎 대신 작은 꽃들이 둥글게 모여 달리고 이를 특별하게 생긴 포(苞)가 둘러싸고 있는데 연한 갈색 바탕에 자주색 무늬가 불규칙하게 발달해 있어서 앉은부채를 처음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아! 세상에 이러한 꽃도 있구나'하고 감탄합니다.
게다가 앉은부채는 '스컹크 캐비지(Shunk Cabbage)'라는 명예롭지 않은 서양이름을 갖고 있는데 냄새가 나고 독성도 있어서 붙은 이름입니다. 이러한 유쾌하지 않은 이름을 얻어가며 냄새와 독을 만드는 이유는 뭘까요. 숲속 식구들에게도 춘곤기라고 할 수 있는 아주 이른 봄에, 지난 여름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비축하여 어렵게 피워낸 꽃을, 그리고 이어지는 열매를, 즉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생존을 위해 이미지 관리마저 포기하는 아픔을 자청하는 셈이죠.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이즈음, 앉은부채가 정말 특별한 모습으로 우리를 미소짓게 합니다. 추운 날씨 탓에 자신을 찾아와 도와줄 곤충들이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 듯 꽃이 스스로 화학반응을 일으켜 열을 냄으로써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는 것이죠. 이를 조사한 과학자들에 의하면 꽃들을 둘러싸고 있는 포안의 온도가 주변의 온도보다 5도나 높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열을 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따뜻하게 하는 앉은부채의 지혜야말로, 수많은 어려움이 가득할 한 해를 맞으며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부터 소중히 여겨 따뜻하게 하고, 이어 그 따뜻함이 온 세상에 퍼져나가 올 한해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어려웠지만 따뜻해서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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