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라는 하나의 신앙을 얻은 대신 나는 계절을 잃어버렸다. 장기공연에 익숙했던 탓에 밀폐된 분장실에 갇혀 비가 오는지, 눈이 오는지 만져볼 기회조차 없었다. 무대 위에 서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순식간에 찾아왔다 눈깜짝할 새 밀려나곤 했다. 봄 바람과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 겸손한 가을의 서늘함, 흰 눈이 펄펄 날리는 겨울의 풍경을 놓쳐버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계절을 잃어버린 게 나는 못내 한스러웠다.그래서일까. 숱하게 다닌 지방공연이 싫지 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여관을 전전하며 그 옛날의 광대처럼 지내는 투박한 삶이었지만 대신 계절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연금술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지방공연을 하면서 나는 계절을 느낀다. 그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비행기도 타고, 기차도 타는 여정 속에서 내가 떠돌이라는 사실을 조금은 쓸쓸하게, 그리고 기꺼이 받아 들일 수 있다.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지방에서 공연할 때는 봄이었다. 그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 계절의 비밀을 훔쳐본 것 같은 경이로움을 느꼈다. '신의 아그네스' 때는 겨울과 봄을, 그리고 '햄릿'을 공연하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봄을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유람'의 의미는 아니다. 밭은 기침소리조차 자제하는 고요함, 사인을 받기 위해 분장실로 찾아오는 주저하는 몸짓, 서성거리며 내미는 손의 따뜻함에 대한 이야기다.
단지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는 것만이 지방 공연에서 내가 얻는 건 아니었다. 지방 공연을 다니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만남이 바람처럼 밀려오곤 한다. 그리고 그것은 늘 과분한 대우와 찬사를 동반해 온다. 그때마다 나는 어떤 경이로움에 휩쓸려 자문하곤 한다. 내가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가질 수 있을까. 이건 너무 행복하구나. 그들의 환대가 나에게 합당한 건가. 나의 친구는 말했다. 그것은 진정한 배우가 되기 위해 그토록 힘겹게 노력했던 내 지난날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나는 '햄릿'을 공연 하면서 발이 심하게 아팠다. 광대들이 햄릿을 찾기 위해 무대 위를 있는대로 휘저으며 달리는 부분을 내 발이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 공연이 시작되었을 때 이렇게 발이 아플 걸 예상 못하고 천천히 달리는 조절을 하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조절이라는 계산은 내게 없었다. 그것은 이른바 아무도 못 말리는 '박정자의 고질병'이다.
광주에서 '햄릿' 첫날 낮 공연을 끝냈을 때였다. 분장실 문이 소리없이 열리더니 한아름 꽃이 먼저 들어왔다. 전형적인 남도사람의 얼굴에 비스킷처럼 툭툭 부서지는 사투리를 숨기지 않는 한 여자가 봄 냄새가 한참 풍기는 보리와 하얀 꽃으로 엮은 다발을 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를 원했다. 대답 대신 나는 발의 통증을 이야기했다. 나는 움직일 수 없다. 침을 맞고 싶다. 처음 본 사람에게 나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엉뚱함에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서 번개처럼 스쳐가는 어떤 약속, 신뢰감을 읽었으니까.
그날 밤 내내 한의사를 '섭외'한 그는 다음 날 빨간 프라이드 차를 가지고 와 나를 안내했다. 이윽고 그는 봄이 가득한 교외로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말했다. 어디든 다 모시고 가고 싶다고. 그리고 처음부터 자기를 아무 의심 없이 나쁜 사람으로 보지 않은 것에 두고두고 감사하며.
그날 소쇄원 양지 바른 마루 끝에 앉았다. 하늘을 향해 겁도 없이 죽죽 뻗어 올라간 대나무들이 열병해 서있었다. 그 사이로 나른함을 한줌 담은 따뜻하고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깐 만났으나 평생을 같이해온 지우 같은 그 광주 사람과 함께 나는 차를 마셨다. 막 피어난 매화 꽃잎이 담긴 따끈한 차 한잔으로부터 나의 봄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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