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나·당 전쟁이 시작됐다." "근대의 민족 중심 역사관에 의거해 전근대를 자의적으로 재단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지난해 말부터 국내 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는 민족과 국가, 또 패권주의를 중심으로 올 한해 다양한 담론을 이끌어낼 것으로 보인다. 넓게 보아 이 문제는 단순히 '역사 바로잡기'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 나아가 동북아시아가 어떤 미래를 그려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고구려사 찾기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엄연히 현재의 문제이고, 나아가 미래의 과제이다. 역사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사회·문화, 정치·외교의 문제로 볼 수 있다. 중국의 고대사 왜곡은 일본의 근·현대사 왜곡 못지 않게, 아니 그보다 훨씬 복합적인 의미로 학계는 물론 시민운동이 벌일 논쟁의 핵심 주제가 될 전망이다.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패권주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이 중화 패권주의의 발로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시작된 연구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은 간도 지역 영토 문제나 남북한 통일 이후 재중동포의 동요를 막자는 성격을 분명히 갖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다민족통일국가'를 간판으로 내건 신중화주의의 일환이라는 점에 여러 학자들이 공감한다.
여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경우 역사적으로나 영토적으로 대국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는 중국의 일방적인 역사 왜곡에 떠밀려가기 십상이라는 위기감이 높다. 올해 6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심사에서 만약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문화유산에 등재되고 북한의 고구려 고분은 보류될 경우,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공인되고 만다는 우려도 그 중 하나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정부와 학계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보는 서길수 고구려연구회장은 이런 최악의 상황을 "우리 민족사 전체의 정체성에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남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
시민운동이 민족주의 불지필 듯
이런 흐름의 전면에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처하기 위한 시민단체 운동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의 주장대로 고구려사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면 한강 이북 지역의 역사는 모두 중국으로 흡수되고 우리에게는 일본보다 짧은 2,000년 역사밖에 남지 않는다"며 '100만 국민 서명 운동'을 벌이고 있는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시민연대, 흥사단, 3·1운동 기념사업회, 광복회 등 10여 개 사회단체가 참여한 '고구려 역사 지키기 범민족 시민연대'가 이런 흐름의 중심에 위치할 것이다.
직접 중국의 역사 왜곡을 규탄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단체가 하나 둘 생겨나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3월 초 1,000명을 발기인으로 출범하는 '고구려와 대진제국(발해)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 중 하나다.
고구려, 발해의 무사도(武士道)와 민족 고유의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 모임은 발기문에서 "민족이 있으므로 나라가 있으며 나라가 있으므로 내가 존재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힐 예정이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국 우월주의, 배타주의를 포함하는 맹목적인 민족주의를 더욱 강화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탈민족·탈국가주의 흐름도 만만찮아
이런 민족주의가 중국의 국가패권주의와 대를 이루는 것이며 사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는 지난달 교수신문 기고에서 "한국사가 일본사, 중국사와 충돌하는 것은 한국사를 한민족의 역사로 보는 기존 한국사의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했다"며 "문제 해결 방안은 역사를 '국사'로 보는 민족주의 역사학의 해체"라고 지적했다.
민족주의 역사학에서의 탈피를 주장하고 있는 임지현 한양대 교수는 지난해 8월 '국사의 해체를 향하여'라는 도발적인 주제의 토론회를 연데 이어 올 3월에 고구려사를 보는 한·중·일의 시각을 비교해 자국 위주의 역사 기술이 얼마나 편협한 것인가를 드러내는 포럼을 준비 중이다.
서남동양학술총서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동아시아의 평화·공존을 위한 다양한 역사관과 개념틀을 모색하고 있는 전형준 서울대 교수도 "순진한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더 큰 지평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런 논리는 원칙에서는 공감을 얻더라도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부족할 수도 있다. 어쨌든 올해는 민족과 역사의 담론이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한 해가 될 전망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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