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과, 마취전문의, 방사능과의, 가정의, 응급실전담의. 10년 전, 아니 5년 전만해도 미국의 의과대학생들에게 이런 전공과목을 택하라고 한다면 한번쯤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젊은 의사들은 다르다. 미 유수 의과대학의 똑똑한 졸업생드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치솟고 있는 레지던트 자리는 피부과와 마취과다. 야간과 주말에 호출을 받지 않는, 그래서 호출기를 차고 다닐 필요가 없는 '9시부터 5시까지(9 to 5)'의 일과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스탠퍼드 의과대학 졸업생인 제니퍼 볼드릭(31·여)은 지금 피부과 전문의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을 밟고 있다. 그가 전공을 택하는 데 가장 고려한 요소는 높은 연봉도, 명예도 아니었다. 통제할 수 있는 라이프 스타일, 즉 근무교대가 끝나면 스스로 시간을 선택할 수 있느냐가 그가 이 전공을 고른 최우선 기준이었다.
미국에서 피부과 의사는 전통적으로 야간이나 주말 근무를 하지 않아도 되고, 때로는 의료보험의 까다로운 규정을 따지지 않고도 고객의 주머니에서 바로 현찰이나 카드를 끄집어 낼 수 있는 과목으로 꼽힌다.
뉴욕 타임스에 소개된 신출내기 피부과 의사 볼드릭은 성형외과를 택하지 않은 데 대해 "나는 가족을 갖기를 원한다. 1주일에 80시간, 90시간을 일한다면 너 자신조차 돌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미 노스웨스턴대학 파인버그 의대 부설 이번스턴 노스웨스턴 병원의 의료교육 책임자인 그레고리 루스테키 박사가 지난 해 9월 미 의료협회저널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2002년에 전공을 선택한 의사들의 55%가 라이프 스타일을 가장 큰 고려 요소로 꼽았으며, 수입 때문에 전공을 택했다고 답한 의사들은 9%에 불과했다.
의대 졸업생에게 레지던트 자리를 연결해주는 '전국 레지던트 연계프로그램'측은 2002년 피부과에 관심을 나타낸 졸업 예정자들은 338명으로, 1997년 244명에 비해 크게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또 5년 전 243명이었던 마취과 지망은 944명으로 4배 가까이 증가했으며, 방사능과 전문의 지원도 5년 전 463명에서 903명으로 2배 가량 늘었다. 반면 1997년 1,437명의 지원을 보였던 일반 외과의 경우 2002년엔 1,123명으로 줄어드는 등 전통적인 의학 분야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지고 있다.
루스테키 박사는 이런 현상을 피부학, 마취학, 방사능학으로의 두뇌유출이라고 부른다. 그는 "친(親) 라이프 스타일적인 전공의 레지던트 자리를 구하지 못한 학생들이 차선적으로 내과의를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의학의 핵심 영역에서 하위 전문분야로의 두뇌유출은 젊은 의사들이 시간과 수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좇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다고 뉴욕 타임스는 분석했다.
미 의학협회에 따르면 피부과 의사들은 주당 45.5 시간을 일해 연 22만1,000 달러의 수입을 올린다. 평균 주당 50시간을 일해 연 13만5,000달러를 버는 내과의사나 소아과 의사, 주당 60시간 근무에 연봉 23만8,000 달러를 받는 일반외과 의사, 주 58시간 일하고 32만3,000 달러를 버는 정형외과 의사에 비해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의학 분야에서 사생활을 강조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는 또 다른 이유로 여성 의사들의 증가 추세를 꼽는다. 2002년, 2003년 학기 동안 의과대학에 입학한 학생의 49.1%가 여성이다. 과거 소아과나 가정의를 선호했던 여성 의사들이 보다 많은 시간과 벌이를 찾아 피부과를 전공으로 선택하고 있다. 여성 의사들에게 '통제할 수 있는 생활 방식'의 상징이 바로 피부과인 셈이다.
아름다움을 찾는 부유층이 늘어나면서 피부과 의사들이 잠재적인 고객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도 많아지고 있다. 뉴욕 맨해튼의 피부과 병원은 점심시간을 이용, 얼굴 레이저 시술과 박피 수술을 받으려는 고객들로 넘친다. 맨해튼의 피부과 의사 데니스 그로스는 "하루에 10∼15명 정도의 환자를 대하지만 응급 환자는 없다"며 "게다가 12분의 보톡스 시술로 고객에서 400 달러를 번다면 그것은 수지맞는 일"이라고 말했다.
물론 자신의 생활을 추구하는 의사들에게 사회적 소명의식 결핍에 대한 비판이 따른다. 그러나 볼드릭은 "나는 힘든 일을 피하려 하는 게 아니다"며 "내가 피하려 하는 것은 다른 전공을 택했을 때의 혼돈 및 불확실성과 시간 통제의 불능"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사회적 책무를 다하기 위해 나를 즐겁지 않게 만드는 어떤 일을 강제로 해야 한다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워싱턴=김승일특파원 ksi810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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