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가 권위주의 독재에 비해 우월한 점은 정치인과 대표로 하여금 국민의 뜻에 응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응답하게 하는 제도적 장치는 선거다. 민주주의 하에서 국민들은 그들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과 대표를 다음 선거에서 처벌함으로써 정치인들로 하여금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국민의 손으로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시작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선출된 대표가 국민의 완벽한 대리인으로 행동하도록 강제될 수 있을 때 완성되며, 이는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대표를 다음 선거에서 퇴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한국 민주주의는 응답성이 약하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공고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정치권은 범국민적 정치개혁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 있다.
지난 해 말에 '차떼기'로 불법선거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나고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터져 나오면서 부패정치를 청산하라는 개혁 요구가 활화산처럼 일어났지만 국회정치개혁특위는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가 제안한 '돈 정치' 개혁안에서 크게 후퇴한 개혁안을 내놓았고, 선관위의 감시권한을 축소하려는 시도까지 하였다. 비례대표 의석의 확대를 통해 지역할거구도를 완화하고 소수파의 원내 진입장벽을 낮추라는 개혁요구에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지역구 의석을 늘리려는 개악을 추진하였다가 국민의 분노를 샀고 정개위는 해체되었다. 급기야는 비리관련 국회의원의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켜 비리 정치인을 비호하는 후안무치의 짓마저 서슴지 않고 있다.
왜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민적 개혁 요구에 응답하지 않고 안하무인으로 개혁이 아닌 개악으로 나가려 하는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은 국민의 요구에 응답하지 않더라도 다음 선거에서 재선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강고한 지역주의로 지역별 일당독재가 자리잡은 구도 하에서 지역유권자들은 자신들의 의사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들도 계속 국회로 보냈다. 과거 3김시대에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요구에 응답하려 하기보다는 정당 보스의 의사를 추종하려 하였다. 그것이 공천을 보장 받고 당선이 될 수 있는 더 확실한 방법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응답하지 않는 정치는 궁극적으로 국민들에게 책임이 있다. 국민들이 제때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처벌하고 책임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대리인인 정치인이 주인인 국민의 요구에 거슬러 부패정치, 정쟁정치, 분열조장정치, 색깔정치, 저질정치를 일삼을 수 있었던 것이다.
2004년을 낡은 정치를 개혁하는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서 국민이 나서야 한다.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 분노하거나 냉소하지만 말고 정치권에 대해 정치개혁을 수용할 것을 요구하고, 이에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4월 총선에서 퇴출시킴으로써 책임을 묻는 행동에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응답하는 정치를 실현시키지 못했을 때 국민들이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들이 부패 정치인을 선출하여 그 대표가 형사처벌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을 때, 현재와 같이 보궐선거를 치러서 대표를 다시 보충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대표를 잘못 뽑은 선거구의 유권자들이 자신의 대표 없이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게 함으로써 응답하지 않는 정치인을 선출한 국민으로 하여금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
이제 정치권이 스스로 응답하기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국민들은 응답의 정치 실현이 실패했을 때 자신들이 최종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로 개혁을 거부하는 정치권을 압박하여야 한다.
임 혁 백 고려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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