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명을 받아 율곡 이이가 지은 '김시습전'에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모두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 "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막고 섰다. 강중은 서거정의 자(字)였다. 무례함에 놀라 보니 바로 김시습(金時習)이다.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벌주려 하자 서거정이 "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만류했다. 그리고 "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 율곡이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김시습의 행색은 서거정의 화려한 행차와 대비된다. 하지만 김시습은 권세에 주눅 들지 않고 자유분방했다. 서거정이 수모를 당하고도 감히 벌주지 못했던 것은 김시습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우월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현실의 지위를 따진다면 견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김시습이 어떻게 이런 우위에 있었을까?계유정난으로 갈린 두 지식인
역사에 가정이란 없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기 위해 벌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없었다면 서거정과 김시습의 운명은 그처럼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어릴 때부터 비범한 능력으로 주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김시습은 다섯 살 때 세종 앞에서 재주를 보여 장차 크게 쓰겠다는 약조를 받았고, 서거정은 여섯 살 때 시를 지어 중국 사신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게다가 당대 최고 문인 관료였던 이계전에게 동문수학한 처지였으니, 그들의앞날은 보장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유교적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든 왕위 찬탈은 21세의 순수했던 젊은 선비 김시습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소식을 접한 김시습은 삼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다가 모든 책을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뒤 평생 이어진 방랑의 길을 떠났다. 그때 서거정은 침묵했다. 조선시대 초대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외손자로 최대 문벌가의 자손이었을 뿐 아니라, 세조가 대군일 때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집현전 교리로 있던 젊은 관료 서거정은 나서지 않았다. 아니 왕위찬탈을 주도했던 한명회, 권람, 신숙주 같은 공신들의 삶을 찬양하는 글을 수없이 지어 바쳤다.
그랬으니 서거정이 세조·성종이라든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최고 권력자로부터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은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육조 판서를 빠짐없이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당대 문풍을 좌우하던 대제학의 자리를 무려 23년 동안 독점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김시습 만큼 불운한 삶을 산 지식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서거정 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서거정의 여유와 김시습의 번뇌
한 작가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안팎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작가와 고통스런 삶을 견뎌야 했던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서거정과 김시습도 마찬가지다. 삶의 행로에서 예감할 수 있듯 서거정은 술과 시를 매우 좋아한 작가였다. 시벽(詩癖)과 주벽(酒癖)이 있다고 곳곳에서 고백했다. 현재 전하는 작품만 해도 6,000수가 넘는데, 술을 노래한 것 또한 상당수에 달한다.
'홍진에 묻혀 백발이 되도록 세상을 살아왔는데(白髮紅塵閱世間)/ 세상살이 가운데 어떤 즐거움이 한가로움만 같으리(世間何樂得如閑)/ 한가로이 읊조리고 한가로이 술 마시며 또 한가로이 거닐고(閑吟閑酌仍閑步)/ 한가로이 앉고 한가로이 잠자며 한가로이 산을 사랑한다네(閑坐閑眠閑愛山)'
'한가로운 가운데(閑中)'라는작품이다. 짧은 7언 절구 속에 한가롭다는 뜻인 '한(閑)' 자를 무려 일곱 번이나 쓰고 있다. 한시를 지을 때 같은 글자를 두 번 쓰는 것도 금기로 여기는데 일곱 번이나 썼으니 참으로 대단하다. 그만큼 한가로움을 사랑했고 실제로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가로운 삶을 살았다. 한가롭게 시를 짓고, 한가롭게 술 마시고, 얼큰하면 한가롭게 거닐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한가롭게 앉았거나 느긋하게 낮잠을 즐겼다. 때론 정원에 가꾸어 놓은 가산(假山)의 경치를 감상하던 그런 한가로운 삶!
김시습도 그에 못지않게 시와 술을 사랑했지만 그가 그려낸 실상은 판이하다. 자신의 깊은 고뇌를 토로하고 있는 '번민을 서술하다(敍悶)'의 첫째 수는 이렇다.
'마음과 세상일이 서로 어긋나니(心與事相反)/ 시를 짓지 않고서는 즐길 일이 없다네(除詩無以娛)/ 술에 취한 즐거움도 눈 깜짝할 새의 일(醉鄕如瞬息)/ 잠자는 즐거움도 다만 잠깐 사이라(睡味只須臾)./…/ 인연 없어 나라님께 몸 바칠 수도 없으니(無因獻明薦)/ 눈물 닦으며 탄식이나 하리라(淚永嗚呼)'
자신과 세상이 어긋나기만 해서 시로 풀어버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깊은 시름이 선연하다. 술로도 잠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깊은 번뇌, 그래서 어찌할 도리 없어 눈물 흘리며 안타까워하던 모습이 바로 김시습의 자화상이다.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 탐욕스러운 지배층이나 부조리한 세태를 조롱하고 풍자한 것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가 추구한 시 세계의 본령은 이처럼 자기 연민과 갈등을 절절하게 토로하거나 정신적 방황 속에서도 자신의 실존적 주체를 깊이 응시하는 작품들이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극도의 분노와 기행(奇行)만큼 내면세계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고독한 시인이었다. 이들이 엮어낸 서사 세계 역시 그러했다. 서거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화집(笑話集)인 '태평한화골계전'을 썼다. 세상의 근심 걱정을 잊기 위해 문인 관료 주변에서 떠돌아다니던 우스갯소리를 모아 편찬한 것이다. 거기에는 화락한 웃음이 흘러 넘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반면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집 '금오신화'를 남겼다. 거기서 소외돼 쓸쓸한 최후를 맞는 남자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이런 비극적 분위기는 김시습이 보였던 세계와의 불화와 무관하지 않다. 현실과 화합할 수 없었던, 그래서 평생을 비분과 방랑으로 지내야 했던, 그러다가 충청도 조그만 절간에서 고독한 생을 마감했던 것이 그였다. 그것은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과 너무도 닮아있다. '금오신화'를 써서 석실(石室)에 감추었다는 일화는 자신이 품고 있던 현실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진정으로 이해해 줄 만한 지기(知己)를 기다렸다는 뜻일 것이다.
죽어서 잊혀진 자, 죽어서 살아난 자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조정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해 심성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뉜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부른다. 서거정이 관각파 문인을 대표한다면 김시습은 방외인을 대표한다. 실제로 서거정이 조정에서 보인 역할은 대단했다. 개인 저술을 제외하고 국가의 요구로 편찬한 것만 해도 '경국대전' '삼국사절요'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등 수백 권에 이른다. 거기에 비하면 김시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뒷사람의 평가는 흥미롭다. '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서거정이 죽던 날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고 혹평했다.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이다. 김시습은 생전에 한번도 '조선왕조실록'에이름이 오르지 못했지만 죽고 나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가 남긴 글을 수습해 간행해야 한다는 논의로 시작된 '김시습 다시 보기'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됐다. 대의명분을 중시한 사림들이 김시습의 절의(節義)에 주목한 것이다. 결국 정조는 김시습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서거정과 김시습은 죽어서도 엇갈린 삶을 살았다. 역사는 준엄하며 그것은 올곧게 산 자의 편이다.
정 출 헌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서거정
1420년(세종 2년)에 태어나 1488년(성종 19년)에 69세의 나이로 숨졌다. 명문 가문의 일원으로서 평생 정계의 핵심에서 떠난 적이 없었다. 여섯 임금을 섬기는 동안 육조 판서를 두루 거쳤을 뿐만 아니라 대제학(大提學)을 무려 23년간 독점했을 정도다. '사가집(四佳集)' '태평한화골계전' '필원잡기' '동인시화' 같은 개인 저술을 남겼는가 하면,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동문선' '경국대전' 같은 관찬서의 편찬 작업을 주도해 15세기 관학(官學)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 김시습
1435년(세종 17년)에 태어나 1493년(성종 24년)에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변변치 못한 무반(武班)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부터 신동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쫓아내는 불의를 목도한 뒤 속세를 등지고 승려 행색으로 전국을 떠돌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 간혹 현실세계로 복귀를 희망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충청도 무량사에서 쓸쓸한 삶을 마쳤다. 유고를 모아 편찬한 '매월당집'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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