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데 계속 보게 돼요." SBS 수목 드라마 '천국의 계단'이 인기다. 시청률은 40%를 넘어서 '꿈의 시청률' 50%를 향해 달리고 있다. KBS와 MBC가 '천국의 계단'을 누르겠다는 각오로 야심차게 새 드라마를 선보였지만 3파전이 벌어진 1월1일, 시청률은 '천국의 계단'(41.1%) '천생연분'(12.5%) '꽃보다 아름다워'(10.8%) 순으로 '천국의 계단'의 압승이었다. 상투적인 소재, 허술한 연기, 비현실적 캐릭터 등으로 숱한 비난을 받으면서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의 눈길을 잡아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게으른 기획
'천국의 계단'에는 신선한 시도라고는 하나도 없다. 스토리는 뻔하다.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가 얼기설기 얽혀 있다. 콩쥐 팥쥐식의 악한 계모, '언니'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생('라이벌', '유리구두'), 교통사고와 기억상실('진실', '겨울연가'), 의붓 남매 사이의 사랑('피아노', '가을동화'), 여기에 돈 많고 멋있는 남자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고, 여주인공은 죽을 병에 걸린다('아름다운 날들'). 이보다 더 상투적일 수는 없다. 게다가 드라마 보기의 큰 재미인 '반전'이라는 요소는 아예 포기한 듯 드라마는 1회 첫 장면에서 여주인공의 죽음을 바로 암시했다.
등장인물의 성격 또한 지극히 평면적이다. 인간의 다양한 심성을 드러내는 복잡하고 현실적인 캐릭터가 인기를 얻는 요즘 추세와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드라마 속에서 최지우는 '말괄량이' 성격을 입히려고 무던히 노력하지만 캐릭터가 무색에 가깝다. '아름다운 날들' '겨울연가' 등에서와 마찬가지로 송주(권상우)와 태화(신현준)라는 정반대 성격의 남성 사이에 무기력하게 던져진 여성 캐릭터의 '백치화'는 필연적 결과다. 여기에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계모 태미라(이휘향)와 눈 앞에 돌아온 딸도 몰라보는 무능한 아빠는 도저히 현실성이 없는 극단이다.
등장인물의 연기는 또 어떤가. '아름다운 날들'에서 '실땅님'(실장님)을 '겨울연가'에서는 '둔상아'(준상아)를 연발하던 최지우는 이번에 '사당님, 사당님'(사장님)을 외쳤고, 눈 크게 뜨기가 악녀 연기의 정수인 양 김태희의 부릅뜬 두 눈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권상우는 끊임 없이 욕구 불만에 가득한 눈빛을 던지고, 신현준은 히스테리컬한 표정으로 얼굴을 있는 힘껏 찌푸린다. 결국 '천국의 계단'은 드라마 몇 편은 충분히 만들 수 있을 만한 온갖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마구 뒤섞어 만든 게으른 기획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시청자 TV를 희롱하다
"그래도 시청자가 좋아하지 않느냐"는 항변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천국의 계단'의 시청 양상은 여타 드라마와는 다르다. 드라마의 내용에 공감하고 아끼기보다는 정기적으로 시청하면서도 도리어 "봐준다"는 식으로 경멸하며 본다.
시청자들은 예상한 대로 극이 흘러가는 재미를 '천국의 계단'을 보는 이유의 으뜸으로 꼽는다. 너무도 뻔한 이야기, 단순한 인물 설정으로 시청자들이 "저거 너무 비현실적이다" "저건 말도 안돼"라고 드라마 내용에 깊숙이 개입해 끊임없이 간섭하며 볼 수 있게 한다. 결국 "거봐, 내가 저럴 줄 알았다니까"라고 TV를 희롱하고, TV보다 우위에 있다는 쾌감을 안긴다.
'대중문화 낯설게 읽기'의 공동저자인 문화평론가 박기수씨는 이 현상을 '발췌 향유'라는 말로 설명했다. 그는 "시청자는 수동적이거나 무기력하지 않다. 시청자는 원래 기획 의도와 무관하게 드라마 속에서 자신과 관련한 문제를 쟁점화해 그 부분만을 발췌해 향유하는 능력을 지녔다. 때문에 모든 드라마가 완결된 서사성을 지닐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즉, '천국의 계단'의 경우 혹자는 유치함과 비현실성을 '씹는 재미'로 보고, 일부는 화려한 상류층의 모습에 집중하며, 또 다른 사람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무모할 정도로 집착하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 몰입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 드라마를 즐기며 나름대로 '향유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시청자 개개인의 상처 치유 효과
이 같은 현상은 '개그콘서트'(KBS2)나 종영된 '인어아가씨'(MBC)의 시청태도에서도 드러난 바 있다. 개그콘서트의 대부분의 코너는 1년 넘게 지속된 뻔한 내용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예측 가능함을 즐긴다. '인어아가씨'의 경우도 억지 설정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비현실성을 꼬집는 재미로 시청하는 사람이 많았다. 때문에 기획의도와 달리 일부는 사회 지도층인 신문사 사장과 그 부인의 유치한 싸움을 조롱하는 맛으로 드라마를 시청했고, 혹자는 주인공 아리영이 매일매일 제공하는 생활 정보에 집중해 드라마를 시청했다. 이들에게 '인어아가씨' 자체가 지닌 서사성은 의미가 없다.
결국 극단적 설정과 인물을 비틀어 희롱하는 것이 TV 보기의 한 형태로 자리 잡은 셈이다. 문화평론가 김종휘씨는 이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정서적 치유를 거친다고 해석했다. "이 드라마 속 설정은 할리퀸 로맨스나 만화 수준이다. 그 극단성을 욕하지만 바로 거기에 인간 내면을 긁어주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가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담담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극단적 인물과 설정을 내세워 우리 내면의 정신적 상처(트라우마)를 파헤쳐 줌으로 쾌감을 선사한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다' 하는 안도감 같은 것이다. '천국의 계단'이 먹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지향기자 mis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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