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회를 맞으며2000년 11월1일에 첫 회가 나간 매일 칼럼 '오늘'이 오늘로 1,000회를 맞았다. '오늘'의 첫 칼럼 제목은 '추축국'이었다.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1936년 11월1일 로마와 베를린을 잇는 이탈리아-독일 파시스트 추축의 성립을 밀라노에서 선언한 데서 소재를 끌어왔다. 당초에 '오늘 속으로'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 난은 493회 '에머슨'(2002년 5월25일자)에서부터 '오늘'이라는 더 간결한 이름을 지니게 됐다.
한국일보 독자들이 잘 아시다시피, '오늘'은 그 날에 태어나거나 죽은 인물, 또는 그 날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되돌아보는 칼럼이다. 처음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당시 심의실장으로 있던 박래부 논설위원이다. 그 즈음 그는 내 앞에서 '오늘의 소사' 형식의 매일 칼럼 얘기를 아침 저녁으로 꺼내며 "그걸 누가 맡으면 좋을까?"고 되뇌었다. 결국 나더러 하라는 말을 돌려서 한 것이었는데, 그 아이디어 자체에도 시큰둥했던 데다 아둔하기까지 했던 나는 "박 선배가 맡으시면 되겠네요"라는 말만 심드렁하게 되풀이하곤 했다. 똑같은 말을 일주일쯤 들은 뒤에야 나는 선배 기자의 의뭉한 속셈을 알았고, '모색 21, 전환기의 이념과 사상'이라는 장기 시리즈 기사를 막 마치고 손이 비어있던 내게 '품은 많이 들고 보답은 불확실한' 이 일이 피할 수 없는 잔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그런 식으로 '오늘'이 시작되었다.
소박한 '교양 칼럼' 집필자로서, 나는 '오늘'을 쓰며 대상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주관적 평가를 되도록 삼가려고 애썼다. 그러나 채점자가 되고 싶은 마음 한 구석의 욕망을 그 애씀이 늘 성공적으로 잠재우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아니, 특정 날짜와 관련된 수많은 인물과 사건들 가운데서 소재로 누구(무엇)를 취하고 누구를 버릴 것이냐를 정하는 과정 자체에 이미 내 주관적 평가가 녹아 들었을 것이다. 어느 해 5월에는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스러져간 김귀정, 이재호, 윤상원 세 사람을 잇따라 다뤄 신문사 안에서까지 가벼운 눈총을 받기도 했다.
소재로 삼은 인물이나 사건들의 압도적 다수가 서양 쪽이라는 점을 불만스러워 하는 독자들이 많았다. 나 역시 불만스럽다. 그 불균형이 서양에 대한 내 편애에 바탕을 둔 것이라기보다 기술적 문제를 우회한 결과여서 더 그렇다. 20세기 이전 동아시아 지역 사람들의 생몰일이나 연대기는 대개 태음력으로 기록돼 있어서 '오늘'의 소재로 골라내기가 어려웠다. 물론 태음력 날짜를 그레고리오력으로 환산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내 열정이 거기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많은 독자들이 '오늘'을 격려하고 꾸짖어주셨다. 꾸짖으신 분들 가운데 일부는 내 세계관을 바로잡고자 하셨고, 다른 일부는 사실의 어긋남을 바로잡아주셨다. 그 분들의 질정을 통해 나는 몰랐던 것을 새로 알게 됐고, 세상을 바라보는 앵글도 슬며시 조절하게 되었다. 격려해주신 분들과 마찬가지로, 나무라신 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한다.
질정의 대열에 선 독자들 가운데 두 분의 이름만 기록해두고 싶다. 내가 고종의 무능과 명성황후의 이기주의를 모질게 질타했을 때, 국사학자 이승렬씨는 당대 상황에서 그들에게 허락된 선택지가 많지 않았음을 고려하라고 충고해주었다. 미국 지진학자 찰스 리히터를 다룬 칼럼이 나간 뒤에는, 기상청 지진담당관 조영순씨가 내가 리히터 진도와 리히터 규모를 혼동하고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1,000회를 맞은 오늘, 함께 자축하고 싶은 동료 기자 둘이 있다. 한 사람은 편집디자인부의 김영민 기자다. 그는 '오늘'이 시작되고 한 달쯤 뒤부터 삽화를 맡아 지난 3년 여 동안 나와 함께 이 난을 지지고 볶아 왔다. 또 한 사람은 편집부 박태희 기자다. 그는 A5면 광고 사정에 따라 '오늘'을 때로는 길쭉하게 세우고 때로는 넙적하게 눕히느라 손품을 팔고 있다. 노파심에서 독자들께 알린다. 오늘 이 지면은 '오늘'의 대단원이 아니다. '오늘'은 계속된다.
/고종석 논설위원
"빠진 이" 채우기
'오늘'이 매일 칼럼이라는 말에는, 곰곰 따져보면, 어폐가 있다. 한국일보가 발행되지 않는 날에는 이 칼럼도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오늘'은 일요일이나 추석 연휴, 설 연휴 같은 날들을 어쩔 수 없이 건너뛰었다. 그러나 칼럼이 3년 3개월째 계속되다 보니 그 '빠진 이'들도 자연스럽게 채워졌다. 평년의 경우 요일은 해마다 하루씩 뒤로 밀리고, 태음력을 바탕으로 한 추석과 설은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에서 오락가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날이 이틀 있다. 그 중 한 날은 1월2일이다. 1월1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신문 기자들의 휴일이므로, 다시 말해 1월2일자 조간신문이 나오지 않으므로, '오늘'은 지금까지 이 날을 네 번이나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월1일에 신문 기자들이 일하게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건너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른 한 날은 2월29일이다. 알다시피 이 날은 윤일이다. 다시 말해 네 해에 한 번씩 돌아오는 윤년에만 있는 날이다. 지금까지 '오늘'을 연재하는 동안에는 윤년이 끼여들지 않았으므로, 나는 2월29일자 '오늘'을 쓰지 못했다. 마침내 올해가 윤년이다. 그러면 올해는 2월29일자 '오늘'을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으리라고 미리 고해야 할 것 같다. 공교롭게도, 올해 2월29일이 신문이 나오지 않는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2월29일자 '오늘'을 쓰기 위해선 앞으로 네 해를 더 기다려야 하는데, 그 때까지 이 칼럼이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를 빌려, 빠진 이 두 개를 채워넣고 싶다. 우선 1월2일. 1959년 1월2일은 옛 소련의 달 탐사 로켓 루니크 1호가 지구를 떠난 날이다. 이 사건이 지닌 의미는 인간이 만든 물체가 역사상 최초로 지구 중력권 바깥으로 나갔다는 데 있었다. 1957년 10월4일 발사된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에 이어, 소련인들은 다시 한번 우주 탐사 영역에서 미국인들의 기를 죽인 것이다. 초속 8㎞로 출발해 이내 초속 11.2㎞에 이른 무게 362㎏의 루니크 1호는 지구 중력에서 해방돼 월세계 6천㎞까지 다가갔다. 루니크 1호는 달의 자장(磁場)에 대한 데이터를 지구로 보낸 뒤 타원형 궤도를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돌았다.
다음 2월29일. 1792년 2월29일은 '세빌리아의 이발사', '빌헬름 텔' 같은 오페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가 태어난 날이다. 윤년의 윤일에 태어난 사람들의 운명에 따라 로시니도 4년에 한 번씩 생일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대의 평균 수명을 훌쩍 뛰어넘는 76세까지 산 이 작곡가는 외려 여느 사람들보다도 훨씬 적은 회수의 생일 파티를 열었을 것이다. 37세에 '빌헬름 텔'(초연된 곳이 파리여서 프랑스어 식으로 '기욤 텔'이라고도 한다)을 작곡한 이후 로시니는 오페라 작곡에서 손을 뗐다. 그 이유가 재미있다. 그 전에는 저절로 오페라가 써졌는데, 그 뒤로는 오페라를 쓰려고 했더니 궁리를 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천재란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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