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주간교수신문이 전국의 대학교수 7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대다수가 2003년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사자성어로 '우왕좌왕(右往左往)'을 뽑았다. 사회 각 분야가 제자리를 찾지 못한데 따른 결과였다. 한국일보 이상호 논설위원은 또 지난달 29일자 칼럼 '지평선'에서 일반인들이 2003년을 한 글자로 표현한다면 전(錢)이라는 한자가 유력할 것이라고 짚었다. 대북 송금부터 굿모닝시티 불법 분양, 불법 대선 자금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돈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는데 카드 빚, 로또 열풍까지 감안하면 전(錢)이라는 표현에 공감이 간다.지난해 국내와 미국프로야구에서 가장 많은 돈을 투자한 삼성과 뉴욕 양키스가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는 데 실패했다. '투자=우승'이라는 프로 스포츠 세계의 통념(通念)이 빗나간 경우이다.
그러나 삼성 다음으로 많은 돈을 투입한 막내팀 SK가 준우승하는 성과를 거뒀다. 삼성과 양키스는 예외였지만 투자가 성적으로 연결된 케이스로 꼽힌다. 선수들의 기대 이상 활약과 신임 조범현 감독의 짜임새있는 팀 운영, 프런트의 적절한 뒷받침이 SK의 성공요인으로 평가된다. 이와 더불어 정규시즌 막판과 포스트시즌 때 거액의 보너스를 베팅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중 하나이다.
지도자와 선수를 대폭 젊은 세대로 교체한 SK는 지난해 시즌 초반부터 선두권을 달렸지만 후반기 들어서는 급격히 성적이 하락했다. 이와 반대로 한화는 초반에 하위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으나 후반기들어 대반격에 나서 7연승 등을 거두며 4강에 근접했다.
한화는 1승차로 앞선 SK와의 일전 등 5게임을 남겨 놓고 포스트시즌 진출이라는 지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게임 당 2,000만원의 승리 보너스를 내걸고 마지막 승부수를 띄웠다. SK와의 대전 홈경기에서 0―5로 완패한 한화는 5위로 시즌을 마감, '당근'을 앞세운 라스트 스퍼트는 도로아미타불이 됐다.
당시 경기를 지켜 봤던 한화 관계자는 "매경기 보너스를 걸자 팀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졌다. 그러나 SK 덕아웃 분위기는 더 환했다. 결국 무섭게 달려드는 SK에 힘 한번 못쓰고 무너졌다"고 말했다. 한화측은 허망하게 패한 다음 SK가 포스트시즌 티켓이 걸려있는 한화전에 무려 1억원을 승리수당으로 베팅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땅을 쳤으나 이미 기차가 떠난 뒤였다.
거액의 가욋돈이 약발을 발휘, 한화와 SK의 운명이 엇갈린 것을 떠올릴 때마다 국내 프로스포츠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각구단의 전력이 평준화돼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올 시즌에는 구단, 선수 모두에게 당근의 유혹이 훨씬 더 할 것으로 생각한다. 올해 프로야구가 돈(錢)으로 시작해 돈으로 끝나지 않을까 걱정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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