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덴티티'(2003), '존 말코비치 되기'(1999), '미드나잇 가든'(1997)의 공통점은? 일단 두 가지만 짚는다면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 또는 이상한 사회를 그린 영화라는 것. 그리고 존 쿠삭이 거의 유일하게 온전한 사람으로 나온다는것이다.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존 그리샴 원작의 '런어웨이'(Runaway Jury)는 배심원 매수를 둘러싼 법정 스릴러. 여기서 존 쿠삭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배심원 니콜라스로 나와, 정의와는 상관 없이 배신과 음모와 조작으로 얼룩진 법정에 강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런어웨이'는 '12명의 성난 사람들'이나 '앵무새 죽이기', '어 퓨 굿맨', 'JFK'처럼 변호사와 검사 사이의 불꽃 튀는 대결을 그리기보다는 배심원의 이합집산을 다뤘다는 점에서 색다르다. '인사이더'처럼 거대 기업의 보이지 않는 위협이 아니라, 집요하고 끈질긴 배심원 매수를 통해 재판을 이기려는 시도를 보여준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총기 사고로 남편을 잃은 여인이 무기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무기회사는 브로커 랜킨 피츠(진 해크만)를 통해 배심원 매수에 나선다. 거대 무기회사의 전폭적 지원 아래, 랜킨 피츠는 지하 창고에 수십 대의 스크린과 첨단 추적 장비를 갖춰 놓고 법정과 변호사 웬델 로, 배심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추적한다. 이에 비하면 원고측 변호사 웬델 로(더스틴 호프만)는 왜소한 키만큼이나 볼품 없어 보인다. 이때 원고와 피고 양측에 1,000만 달러를 요구하며 배심원 매수를 장담하는 의문의 여인 말리(레이첼 와이즈)가 끼어 들면서 이야기에 가속도가 붙는다.
보통의 영화라면 선악 구도를 뚜렷이 해 변호사 웬델 로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게리 펠더 감독은 후반부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긴박감을 유지한다. 이런 이유로 더스틴 호프만보다 진 해크만의 악역 연기가 더 돋보인다. 해병대 출신의 권위적 중년남자, 배심원실에 몰래 술을 숨겨 들어온 부인 등 다양한 행태의 배심원들도 흥미를 자극한다. 선거인명부에서 무작위로 뽑혀 일당 16 달러와 값싼 도시락을 제공받는 것만으로 법정 봉사를 해야 하는 배심원의 세계도 재미있게 그렸다. 베테랑 연기자 진 해크만과 더스틴 호프만이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알쏭달쏭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재미는 뒤로 가면서 조금씩 떨어진다. 교묘한 술수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배심원을 하나 둘 탈락하게끔 술수를 쓰는 니콜라스 덕분이다. 명민해 보이는 존 쿠삭의 이미지는 영화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이는 데는 순기능을 하지만, 거꾸로 그의 선량한 눈매는 영화가 결국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에 대해 예측하게 하는 역기능을 한다.
콜럼바인 고교 총기 사건을 통해 미국의 환부를 들춰 보였던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에 비한다면 '런어웨이'의 교훈은 노골적인 데가 있다. 웰메이드 상업 영화지만 그 이상은 되지 못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아마 그것은 '웰메이드' 이상을 써내지 못하는 원작자 존 그리샴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1월16일 개봉.
/이종도기자 ecr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