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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어렵게 태어난 2㎏ 신생아의 병상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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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의 세상속으로]어렵게 태어난 2㎏ 신생아의 병상일기

입력
2004.0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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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새해에 관한 작은 이야기다. 모진 시련을 걷어내고 희망으로 새로운 시작을 맞는 얘기다. 평범하고 통속적이라고? 그런 말 말라. 통속이란 우리네의 진솔하고도 보편적인 정서의 다른 표현일지니. 더구나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뭔가 다를 것을 기대하며 맞는 새해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메시지가 있겠는가.주인공은 서울아산병원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만난 아주 잘 생긴 사내아기 한다운(韓多運)이다. 다운이는 지난해 11월20일에 태어난(아니, 꺼내졌다는 표현이 맞겠다) 아기다. 세상 빛을 본지 이제 겨우 한달 보름이지만, 해를 넘겼으니 우리식 나이 셈법으로는 어엿한 두살바기다.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지금도 태(胎) 안에 있을 아기다. 당초의 출산 예정일까지는 아직도 일주일이나 남았으니까. 두 달 가까이나 당겨 세상에 나온 셈이다. 워낙 치명적인 병이 들어 한시라도 엄마 뱃속에 두어둘 수 없었던 때문이다. 도저히 살아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던 다운이는 벌써 두번의 큰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기적처럼 깨끗하게 완쾌돼 새해를 맞았다. 다운이가 얻은 삶은 쉽게 태어나는 아기들에 비해서는 극적일지 모르지만 더 큰 어려움을 겪고있는 숱한 이들에 비해서는 별 두드러질 것 없는 사례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나름대로 힘겨웠던 다운이의 재탄생 과정을 들어보라. 세상과 삶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느껴볼 수도 있으려니.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라면 갓 태어난 아기를 볼 때의 느낌만한 게 있을까. (부모들이라면 자녀들이 태어나던 예전 그 순간을 떠올려 보라) 온 몸에 온통 발갛게 주름이 남아있는, 부서질 듯 연약하고 작은 몸. 매일매일 100g씩 몸무게가 부쩍부쩍 늘어나고 있다지만 다운이는 그래도 여전히 다른 아기들보다 작다. 보통 신생아의 정상체중이 3㎏를 훌쩍 넘기는 것에 비하면 다운이는 아직도 2.8㎏ 정도에 불과하다. (하기야 갓 태어났을 때 겨우 2㎏ 남짓했던 체중마저 수술 즈음에는 1.7㎏으로까지 떨어지기도 했으니까)

그래도 엄마 품에 가만히 안겨있는 모습은 제법 자란 아기처럼 의젓해 보인다. 동그란 머리에 솜털 같은 머리카락, 신생아답지않은 오똑한 콧날, 오물거리는 입술, 두런두런 주위 소리를 알아듣듯 잠깐 떴다 감는 눈…. 갓난 아기의 모습에서 언제나 가장 신기하고 예쁜 것은 손발이다. 솜씨 뛰어난 장인(匠人)이 빚어낸 듯 정교한 미니어처 같은 손발톱, 앙증맞은 손바닥에 어른과 똑같이 잡혀있는 손금. 꼼지락거리는 작은 움직임조차 너무나 경이로워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젖병을 물리는 엄마 조윤경(趙允慶·32)씨에게 지난 한 달여 악몽의 시간은 어느새 아득하다.

지난해 초 다운이를 가진 뒤로 조씨는 아기가 그런 무서운 일을 겪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남편(한민식·韓敏植·33)도, 자신도 건강한데다 집(서울 동대문구 면목동) 근처 병원에서 받는 매달 검진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첫 아이 다민(4·여)이도 초산답지않게 수월하게 낳았던 터였다. 고민이라야 학교 졸업 후 10년을 꼬박 다닌 직장생활을 출산 후 정리하나 마나하는 정도였을까? 다민이는 가까운 친정에 맡기다시피 키웠지만 아무래도 둘째까지 부탁하는 건 무리였다. 아이에게 엄마로서 듬뿍 정을 쏟아주지 못한 게 늘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접어두고 일단 11월 초 회사에 출산휴가를 냈다. 몸에 이상이 느껴진 것은 그 즈음이었다. 난데없이 입덧이 심해지고 하루가 다르게 힘이 느껴지던 태동(胎動)도 잦아든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불안해지긴 했지만 별일이야 있을까 싶었다. 그 달 중순 검진일에 찾은 의사가 전같지 않은 얼굴로 초음파 화면을 한참 들여다 보았다. "큰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처음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서둘러 이튿날 서울아산병원으로 옮겼다. 오랜 진단을 마치고 얘기를 나누는 의료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기의 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습니다. 장이 꼬여서 여러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발병 후 24시간 안에 아기를 꺼내 수술해야 하는데 이미 한참 지난 것 같으니…. 잘못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임신부에게 이보다 더한 청천벽력이 어디 있으랴. 아기의 병명은 '낭종성 태변 복막염'에 '장 무공증'이라고 했다. (이런 전문용어들은 한자로 써야 그나마 대강의 의미를 어림할 수 있다. 囊腫性 胎便 腹膜炎에 腸 無孔症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장이 막히고 터져 태변 등 내용물로 인한 염증고름이 큰 주머니처럼 형성되고 복강에 고이는 병이다. 무슨 이유인지 아기의 소장이 꽈배기처럼 꼬이면서 빚어진 일이다)

분만방식에 대한 설명이 어어졌다. "곧바로 제왕절개로 아기를 꺼내 수술해봐야 할 상황입니다. 그러나 유도분만을 하면 출산까지 3일 정도가 걸립니다. 아기를 살릴 가능성이 더 낮아지지만 어차피 지금도 생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다만 다음의 순조로운 출산을 기대할 수는 있습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다음을 위해 여덟달 가까이 생명을 함께 나누어온 아기를 포기할수야.

꺼내진 아기의 상태는 훨씬 더 심각했다. 이미 배 부위의 피부도 검게 변색돼가고 있었다. 아기 뱃속은 손쓸 엄두가 나지않는 상태였다. 의료진은 개복(開腹) 한시간여 만에 그냥 아기의 배를 덮었다. "가망이 없습니다. 이틀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남편은 아기의 장례준비를 시작했다. 사망확인서까지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뒤늦게 마취에서 깨어난 조씨가 아기를 찾았으나 남편이 만류했다. "어차피 살 수 없는 데 보면 뭐하느냐." 조씨는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착하게 산다고 했지만 그래도 뭐 잘못한 게 많아 벌받는 게 아닐까. 온갖 사소한 일들까지 떠올랐다. 운전할 때 끼어드는 차에 화 냈던 일, 업무상 늘 상대해야 하는 손님들 중 매너 나쁜 이들을 미워했던 일까지도….

그런데 사흘쯤 지났을까. 아기가 아직 살아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상태가 더 나빠지지도, 더 좋아지지도 않은 그대로. 세상에, 그 작은 아기는 모두가 절망한 그 시간에도 끈질기게 생명의 끈을 놓지않은 채 홀로 죽음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의료진부터가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다"고 놀라워 했다. "어떻게든 아기가 살아보려 하는 것 같으니까 한번 수술을 해봅시다. 높게 잡아야 생존률은 5∼10%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전혀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니." 장(腸)의 유착상태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는 점을 감안해서 12월13일로 수술날짜를 잡았다.

수술이 시작되기 전의 분위기는 비장했다. 남편은 비관적인 문구로 가득찬 수술동의서에 사인을 했다.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또는 생존하더라도 평생 심각한 장애를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내용의. 그러나 그 순간의 간절한 바람이야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저 살아만 주기를. 장애는 그 다음 문제였다. 아침 10시30분 아기가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아빠는 가만히 손을 쥐어 보았다. "어쩌면 우리 만나자마자 이별이겠구나." 순간, 아기가 손가락을 꼭 움켜 쥐었다. 작고 연약한 아기의 힘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강하게. "아빠, 제발 나를 살려 주세요"하는 절박한 몸짓인 것 같았다.

피를 말리는 수술은 오후가 돼야 끝났다. 아기 배 속의 염증과 이물질을 제거하고, 막힌 장을 뚫고, 괴사(壞死)한 부분은 잘라내 잇는 대수술이었다. 수술실을 나서는 의사의 표정을 차마 볼 수도,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하염없이 눈물만 쏟고 있는데 마치 꿈 속에서처럼 "잘된 것 같다"는 얘기가 들렸다. 비로소 쳐다본 의사의 얼굴에 미소가 보였다. "아기가 너무나 훌륭하게 잘 버텨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장의 연결부위를 나흘정도 지켜봐야 합니다." 그것 쯤이야. 온 몸에 맥이 탁 풀렸다. 갑자기 지옥에서 천국으로 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편집위원 junlee@hk.co.kr

다운이의 숨 가빴던 투병기는 여기까지다. 다운이는 해를 넘긴 지난 금요일 퇴원을 했다. 앞으로 커가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으리라는 격려를 받으며.

다운이는 당장 어찌될지 몰라 시한일까지 미뤘던 출생신고를 수술 뒤에 하면서 급하게 지어진 이름이다. 글자 그대로 행운이 많다는 뜻으로. 그러나 행운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지 몰라하는 부부에게 주치의 김성철(金成徹·소아외과) 교수는 손을 저으며 겸손해 했다. "저는 별로 한 게 없습니다. 아기를 살려낸 것은 스스로의 놀라운 생존 의지였습니다."

생각해 보라. 그 작고 연약한 아기조차 포기하지 않았던 강렬한 삶의 희망을. 그리고 그것이 극한의 상황을 끝내 이겨내게 한 가장 큰 힘이었음을. 그러니 하물며 우리들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랴. 새해 첫 이야기로 다운이의 사연을 전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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