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우리나라 노사관계는 전쟁상태였다. 전투적인 노조와 구시대적인 사용자가 만들어낸 적대적인 노사관계는 21세기 들어서도 그대로 이어져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비생산적인 노사문화를 청산하지 않으면 한국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우리 노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짚어보고, 시행착오를 거치며 정립된 선진국의 노사관계를 검토해 노사 공존의 길을 모색하는 '함께 가는 노사'시리즈를 연재한다.
동반자적 노사관계는 이룰 수 없는 꿈인가. 적어도 다른 선진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싸우기만 하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줄 것은 주면서 얻을 것은 얻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21세기 들어서는 이 같은 경향이 더욱 뚜렷해졌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노사관계는 기로에 서있다. 적대적 노사관계에서 상생하는 관계로의 국면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한국의 노사관계는 악화일로다.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사용자는 노조와 조합원에 대해 1,000억원 이상의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가압류를 제기했고, 노동자는 이에 대해 파업 자살 화염병과 같은 극단적 무기를 꺼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204명의 노동자를 구속했다. 1990년대 중반 두자릿수로 떨어졌던 노사분규 발생건수는 지난해(12월24일 기준) 317건으로 2년 연속 300건을 돌파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 같은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노동연구원 이원덕 원장은 "정권 초기 노동계의 요구 수위가 높아지면서 대형 노사분규가 터져 나오자 사용자는 대항권 강화를 들고 나와 결국 힘과 힘이 맞부딪혔다"며 "올해는 총선과 경기회복 등으로 노동계의 요구 수위가 더욱 높아질 것이므로 대립적 노사관계가 심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비정규직 차별 해소, 공무원노조 합법화 등 현 정부의 노동관련 공약이 노동계 또는 재계의 반대로 1년간 표류함에 따라 이 역시 올해 노사관계에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LG경제연구원은 노사 양측이 거부하는 노사관계법제도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 논의, 고용조정에 대한 노동계의 저항, 주5일 근무제 법제화에 따른 실근로시간 단축과 임금보전방안을 둘러싼 노사갈등 등을 올해 노사관계의 주요 불안 요인으로 지적했다. 특히 지난달 최종안이 나온 노사관계 로드맵과 관련, 노사는 본격 논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공공연하게 "합의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노동계와 경영계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임·단협을 둘러싸고 해마다 되풀이되는 노사갈등, 이른바 춘투(春鬪)는 더욱 격렬화·장기화할 전망이다. 주5일 근무제 도입 등 노동현장의 변화에 직면, 노동계는 요구수위를 한층 높이고, 임·단투 시기도 총선 이후로 집중할 계획이다. 민주노총 김태연 정책실장은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원청·하청 노동자의 공동임금인상을 요구케 하고, 쌍용자동차 매각 문제와 금융부문의 구조조정 등 노사 이슈도 기업별로 쟁점화하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한국경영자총협회 이동응 상무는 "지난해에도 정부 정책이 전체 사업장 가운데 5∼10% 정도에 불과한 극소수 전투적 노조에 끌려갔다"며 "올해는 이 같은 현상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영계가 쐐기를 박을 방침"이라고 맞섰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이 같이 노사대립만 계속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의 노사관계 국제경쟁력 지수는 조사대상 49개국 가운데 47위였다. 그것도 2000년 44위, 2001년 46위, 2002년 47위 등 순위가 계속 곤두박질하고 있다. 노사관계의 변화는 국가경쟁력을 위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우리 앞에 서있는 것이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올해 노동계 이슈는
■ 노사관계 로드맵
정부측이 지난달 노사관계법제도 선진화방안(노사관계 로드맵) 최종 방안을 노사정위원회에 송부, 이에 대한 논의가 올해 상반기에 본격화한다. 노동계와 재계는 각각 "사용자의 대항권을 강화한 방안" "파업 범위를 대폭 늘인 방안"이라고 상반된 평가를 하면서 '수용 불가'를 천명하고 있다. 정부는 노사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독자적으로 입법을 추진할 뜻을 내비쳤다.
■ 주5일 근무제
대기업을 중심으로 올해 임·단협에서 노사가 가장 격렬하게 대립할 쟁점이다. 입법 과정에서의 나타난 대립구도가 실제 현장 적용과정에서 일선 사업장으로 옮겨지면서 노사간 갈등의 골이 깊어질 전망이다. 사측은 '휴가일수 연 15∼25일로 조정' 등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근로조건을 조정한 정부안을 고수하려 하는 반면 노조측은 현대자동차노조 및 금속노조의 사례를 근거로 기존 노동조건을 지키면서 주5일 근무를 얻어내려는 입장이다.
■ 공공부문 노동권
노사정위원회 관계자는 "올해는 민간부문의 노사 문제가 개별사업장 단위에서 해결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반면 공공부문 노동권 문제가 전면에 부상, 노정갈등이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선 공약사항으로 정부가 입법안을 마련했으나 정부내 보수적 분위기와 노동계의 노동3권 완전보장 요구에 부딪쳐 성과를 내지 못한 공무원노조 합법화 문제, 공공부문내 비정규직 문제 등이 쟁점이 될 전망이다.
■ 손배·가압류
노동자 자살을 계기로 지난해 노동계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던 사측의 손해배상청구소송 및 가압류 제기 문제는 올해도 거센 갈등을 불러올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노·사·정 대표가 손배·가압류 관련 합의에 도달했으나 불법파업과 관련, 사용자가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1,000억원 이상의 손배·가압류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노동계가 정부를 상대로 손배·가압류 법제도 개선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盧정부 출범후 노사관계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노사분규는 끝없이 이어졌다. 정권 초기 서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벌이는 힘겨루기 이상이었다. 장기적으로 갈등이 지속돼온 사업장에서 노사분규가 속속 터져 나왔고, 이에 대한 사용자측의 대항권 강화 요구도 거셌다.
지난해에는 국민경제와 시민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대형 분규가 많았던 점이 두드러졌다. 5월과 8월 2차례에 걸친 화물연대의 운송거부, 7월 철도노조의 파업, 6월 조흥은행노조의 파업이 계속 이어졌다. 파업은 대부분 장기간 계속됐다. 배달호씨의 분신 사망으로 불거진 두산중공업 노사분규는 63일이나 끌었고, 임·단협과 관련한 현대자동차의 노사분규도 주5일 근무제 도입이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며 47일이나 지속됐다.
기업도 노조를 대화와 타협으로 포용하기보다는 강경대응 일색이었다. '공장을 외국으로 옮기겠다'는 엄포에서 그치지 않고 노사분규에 대한 사용자의 대항권 강화를 정부에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노동계의 위기 의식은 10월 들어 한진중공업 김주익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 간부의 잇단 자살로 가시화했다. 지난해에는 1991년 이후 노동자의 자살이 가장 많았다. 11월 민주노총의 전국노동자대회에서는 화염병까지 동원한 과격 시위가 벌어졌다.
노동계 관계자는 "현 정부가 초기 친노정책으로 노동계의 기대수준을 높였고 이에 대한 사용자의 불안 의식이 높아져,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후 정부의 노동정책이 반노로 바뀌면서 노동자의 저항이 가중됐다"며 비판했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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