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국가부도위기로 치닫던 1997년 초여름쯤으로 기억한다. YS(김영삼 전 대통령)정권은 각종 비리로 얼룩져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당시 몇몇 언론은 장문의 참회록을 썼다. 그 대상은 다름아닌 김현철씨였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정권 초기부터 대통령의 아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반분하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소통령적 행태는 시간이 갈수록 확대재생산됐고, 그의 비행은 일부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측근과 사정라인이 그의 위험한 행동을 직보하고 만류를 간청했지만 YS는 오히려 그를 감쌌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 언론도 이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쓰지 못했다.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이 참회록을 뒤로 한 채 몇 달 후 나라는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라는 치욕을 맞게 된다.그로부터 4년여가 흐른 2002년초 신문에는 참회록이 또 등장한다. 이번에는 대통령의 인척이었다. 김현철씨의 행적을 빼닮은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두 아들의 비리는 또 한 번의 놀라움과 함께 혀를 차게 했다. 그보다도 DJ의 처조카 이형택씨가 보물발굴사업을 위해 업자로부터 검은 돈을 받고 국가정보원과 군까지 동원한 '권력의 친인척화'는 더 충격적이었다. 이형택씨가 퇴출된 부실은행 간부에서 외부의 힘에 의해 은행을 사실상 감독하는 예금보험공사 전무에까지 오른 경위를 경제부 기자로 목도했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쳤던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썼다.
이젠 세번째 참회록이 신문에 등장할 차례다. 새해벽두부터 이런 류의 글을 쓰는 심정은 매우 쑥스럽고 참담하다. 이번 대상자는 정치쪽은 아니다. 며칠전 검찰의 부름을 받은 김운용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부위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1993년 대한체육회장에 오른 그는 곧바로 장기집권을 위한 정지작업을 시작한다. 대한체육회 회장 또는 부회장 4년이상 역임, 경기단체장 4년이상 역임…. 이듬해 1월 황당한 회장 입후보 요건이 만들어져 외부인사의 출마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통일주체국민회의'격인 체육회장추천위원회를 만들고 그의 측근들로 즐비한 추천위에서만 회장 후보를 낼 수 있도록 했다. 김 부위원장 이외에는 출마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김 부위원장은 이를 통해 재선과 3선에 성공했고, 10년을 집권했다. 견제없는 권력은 반드시 썩는다는 말은 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주변에서 풍겨나는 부패의 냄새는 더욱 진해졌다. 최근의 검찰 수사에서 흘러나오는 '혐의'는 기업 후원금 횡령, 국기원 수익금 착복 등이다. 이 혐의들이 사실로 드러날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이 정도는 체육계에서는 이미 '알려진 비밀'이다. 각론으로 들어가면 그를 둘러싼 검은 뒷소문은 소설 한 권을 족히 쓰고 남을 정도다.
그렇지만 모두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꺼렸다. 오히려 체육계 안팎에서 그에게 동조하며 호가호위하는 이들은 갈수록 늘어나 이익집단을 형성하기까지 했다. 언론도 공범일지 모른다. "언론이 수사기관은 아니지 않느냐"는 변명은 비겁하다. 오히려 아직도 그를 추종하고 있는 언론인이 적지 않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재벌도 이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이 그의 부정적인 면을 알면서도 이건희 회장 IOC위원 만들기를 위해 여러모로 그의 도움을 받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 역시 알려진 비밀이다. 결과는 부정적일 것 같지만, 기자가 쓰는 참회록은 이번이 마지막이길 빈다. 그리고 새해에는 참회록의 주인공들이 쓰는 진실한 참회록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한다.
김 동 영 체육부장 dy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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