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영화배우로 살아온 내게 영화보다 북한, 북한 사람들이 더 가슴에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 어쩌면 그들이 내게 남긴 기억들이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었기 때문인지 모른다.그 가운데서도 1999년 12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통일음악제'는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통일음악제는 남북교류의 첫 문을 연 행사라는 의미도 있지만 나에게는 남한과 북한의 숨겨진 이면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90년 초 미국에서 만난 영화제작자 주돈중씨와 남북합작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장길산'(황석영 작)을 영화하기로 북측과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김영삼 정권의 대북 강경책으로 무산됐다. 이어 북측과 가까스로 성사시킨 아리랑 제작도 물거품이 됐다.
97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 남북문화 개방정책을 표방하면서 다시 베이징으로 가 북한 아태(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사람들과 만나 아리랑 제작을 논의했다.
그런데 99년 초 아태 황모 참사가 '통 크게 평양에서 8·15 통일음악제를 개최하자'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그때 어찌나 놀랐고 흥분됐던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러나 기업들은 통일음악제라는 남북간의 엄청난 행사를 일개 영화배우가 추진한다는 사실을 불신해 투자를 망설였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MBC와 계약하고 12월19일 평양에서 통일음악제를 개최하기로 했다.
그러나 MBC는 그 해 11월 나와 함께 사전답사 형식으로 평양까지 다녀왔음에도 공연료 지불을 미뤘다. 결국 내 처지를 딱하게 여긴 북한의 친구들이 공연료를 절반으로 줄여주기까지 했다.
박재규 전 통일부장관(당시 경남대 총장)은 지인들에게서 돈을 모아 공연료를 보태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평양 공연은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공연 하루 전날인 12월18일, 평양으로 가기 위해 베이징행 중국민항에 올랐는데 북측에 지불하기로 한 공연료 일부를 집에 놓고 탑승한 것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 돈을 갖고 올 때까지 비행기는 이륙하지 못했고 통관하는 과정에 거액이 발견돼 세관에 전부 압수되는 일이 발생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순간 박재규 전 장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베이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베이징에서도 공연료 문제로 한국측 일행으로부터 오해를 받게 됐는데 이 때 북한 아태측 황모, 조모 참사가 나서 "김 선생은 그럴 분이 아니다"며 돈을 마련해줘 나를 감격케 했다.
평양 통일음악제 과정서 북측이 나를 집중 부각시킨 데 대해 한국측 일부 관계자들이 험담과 위협적인 언사를 구사하자 아태 고위관계자 20여명이 직접 한국측 일행을 영접해 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던 모습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지금도 가슴 찡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최근 베이징에 나와 있던 북한의 아태 친구들이 전원 교체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남북관계가 경색될수록 그들의 미소 띤 얼굴이 더욱 그리워진다.
/김 보 애 '민족21' 대표·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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