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2003년의 마지막 날이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곧 섣달 그믐날 밤을 이르는 가장 흔한 말은 제야다. 제석(除夕) 또는 세제(歲除)라고도 부른다. '설'에서 온 섣달이라는 말은 본디 음력 12월을 일컫는 말이고 그믐이라는 말 역시 달의 차고 기움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지만, 태양력이 널리 사용되다 보니 오늘이 섣달 그믐날이 되었다. 그래서 제야의 종을 치는 것도 오늘 밤이다. 제야의 종은 사찰에서는 108번을 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하나, 서울 종로2가 보신각에서는 종을 33번 쳐서 제야의 종으로 삼는다. '제야'라는 제목을 단 찰스 램의 수필을 읽어보니, 제야의 종이라는 것이 서양 사람들에게도 각별한 느낌을 주는 모양이다. 램은 그 글에서 모든 종소리 가운데 가장 엄숙하고 감동적인 것은 묵은해를 보내는 종소리라고 썼다.지난 시절에는 섣달 그믐날 밤에 집안 구석구석에 등촉을 밝히고 밤을 새우는 습속이 있었다. 이것을 수세(守歲)라고 불렀다. 집안 전체에 불을 켜놓는 것은 잡귀의 출입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익숙치 않겠지만, 이 날 밤 잠을 자면 눈썹이 희어진다는 말이 있어서 밤을 새며 윷놀이를 하거나 이야기 꽃을 피우는 것이 불과 한 세대 전까지의 우리 풍습이었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나, '묵은세배'라 하여 이 날 저녁 가까운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는 풍습도 있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므로, 이 날까지는 그 해의 거래 관계를 청산해 주고받을 빚을 남기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간지(干支) 역시 태음력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지만, 신식 셈법에 따르면 오늘이 계미년(癸未年) 마지막 날이다. 독자들께 묵은세배를 올린다. 갑신년(甲申年) 아침에 뵙겠다. 독자 분들 모두에게 갑신년이 강녕(康寧)의 한 해가 되기를 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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