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가들이 주무른 2003년 한국 증시에서 그나마 주식시장을 떠받친 국내 투자 주역은 바로 기업이었다. 상장·등록 기업들은 풍부한 여유 자금으로 자사주를 대거 매입, 소각해 취약한 주식 수급여건을 개선하는가 하면 배당을 늘려 기업 이익을 일부 나마 투자자들에게 나눠주며 주주가치를 높였다. 대주주의 이익보다는 소액 주주와 시장의 요구에 따라 의사결정을 바꾼 기업도 눈에 띄게 늘었다. 개인투자가들이 빠져나가고 기관투자가들조차 절름발이를 면치 못한 올 한해, 기업들은 무분별한 '성장'보다는 실적을 바탕으로 한 '주주중시' 경영으로 한국 증시 패러다임 변화의새로운 문을 열었다.
자사주 10조원 매입, 3조원 소각
올 한해 기업은 자신이 투자 대상이자 투자 당사자였다. 올들어 12월까지 256개 기업이 9조8,996억원의 자기회사 주식을 사들였다. 지난해 7조3,340억원보다 34.6%나 늘었다. 이 중 삼성전자 KT 등 33개 기업은 3조7,406억의 자사주를 아예 소각했다. 이는 지난해 보다 회사 수로는 73.7%, 금액으로는 42.9%나 증가한 것이다. 이익 소각은 시장에 유통 중인 자기 기업 주식을 사들여 아예 없애 버리는 것으로 주식의 희소성을 높여 주가를 올리고 회사 이익을 투자자에게 나눠주는 것과 똑 같은 효과를 낸다.
자사주 매입·소각 기업의 주가는 올들어 평균 42.8%나 올라 같은 기간 종합주가지수 상승률 24.2%를 크게 웃돌았다. 자사주 1,124억원어치를 이익 소각한 대림산업 주가는 172.9%가 올라 최고의 상승률을 기록했고 현대모비스(167.0%), 성신양회(115.5%), 동국제강(95.5%) 등도 급등했다.
고배당에 소액 주주 우선 배당까지
아직 배당 기준일이 더 남아있어 상장사 평균 최종 배당수익률이 나오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배당 계획을 공시한 50개사의 시가배당률(현 주가 대비 배당률)은 평균 6.77%로 지난해 12월 결산 법인의 시가배당률(4.75%)을 크게 웃돌았다. 2001년에는 전체 상장기업의 65.3%가 배당을 실시했지만 지난해 67.9%에 이어 올해는 70%를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주당 1,800원을 배당했던 SK텔레콤은 올해 이보다 3배 이상 많은 5,500원을 배당키로 하는 등 '깜짝 배당'을 발표하는 기업도 속속 나오고 있다.
소액 주주와 대주주를 차등 배당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삼영이엔씨는 대주주에게는 주당 25원을 배당하는 반면 소액주주에게는 이보다 6배나 많은 주당 150원의 현금배당을 실시키로 했다. 한신공영은 소액 주주에게는 대주주의 2배인 15%(액면가 대비)를 배당하기로 했고, STX조선은 대주주 15%, 소액 주주 25%의 차등 배당을 실시할 계획이다.
지배구조 관심 증가
올해는 SK 분식회계사태와 현대 경영권 분쟁, LG카드 문제와 편법상속 논란 등으로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효성, 현대산업개발 동양 두산 등의 대주주들의 경우 해외 전환사채의 신주인수권 행사를 잇따라 포기했고, 많은 기업들이 출자 구조를 투명하고 단순하게 바꿔야 했다.
제일투자증권 김정래 투신법인 리서치팀장은 "장기적으로 증시 상승을 버텨주는 힘은 경제 성장률이 아닌 기업의 도덕성 여부에서 나온다"며 "주주 가치와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양심적인 기업에 대한 투자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섭기자 dre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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