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서울 종로에 있는 한 극장 앞에서 연인인 듯한 20대 초반 남녀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 "뭘 볼까?" "요샌 한국영화가 더 재미 있어." 그들은 주저 없이 그날 개봉된 '실미도'의 티켓을 샀다. 임상수, 봉준호, 이재용, 이준익, 박찬욱, 강우석. 시장 점유율 50% 육박이라는 기념비적 성과를 이뤄낸 2003년의 한국 영화계에서 비평가의 호평과 상업적 성공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중견 영화감독들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영화관은 서로 너무나 다르지만, 유일한 공통점은 모두가 그 흔한 외국 유학 한 번 다녀오지 않은 '토종 386세대'라는 것이다.정계를 비롯한 다른 분야로 진출한 386세대가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실무에서조차 허덕거려 대중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데 비하면, 토종 영화감독의 약진은 제대로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영화라는 자기 분야에서 한 차례도 한눈을 팔지 않고 매진해 왔다. 그 치열함은 내가 아는 그 어떤 운동권 젊은이 못지않다. 1970·80년대 그 흔하디 흔했던 영화감독과 여배우의 스캔들, 공금횡령이나 유용 같은 불결한 단어가 단 한 번이라도 그들 주변에서 흘러나온 적이 있었던가? 대중적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이 시대의 장인이며 결벽한 수도승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스타가 아니다. 대중예술인의 배고픔과 고통을 현장 밑바닥에서부터 온몸으로 버티며 한걸음씩 성장해 온 인물들이다. 구체적인 현장 수련 과정 없이 갑자기 정치 현장의 핵심으로 수혈된 정계의 386세대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경력의 소유자들이다.한 해가 저무는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토종 386세대 영화인들이 내년의 약진을 위해, '태극기 휘날리며', '효자동 이발사', '노근리 다리','그때 그 사람', '역도산' 등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의 2004년에 영광 있으라!
조 철 현 타이거픽쳐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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