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 중순 홍콩에서는 중국 푸젠(福建)성을 여행하고 돌아온 일가족 4명 중 9살된 소년과 아버지(33)가 독감을 앓다 이중 아버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역학조사결과 가족 중 딸(8)은 푸젠성에 체류하던 중 독감에 이은 폐렴합병증으로 사망한 사실도 확인됐다. 홍콩 보건성은 같은 달 20일 이 일가족이 홍콩조류독감(H5N1)에 감염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1997년 조류독감이 처음 인체감염된 이후 두번째였다. 같은 시기 푸젠성과 인접한 광둥(廣東)성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에 의한 폐렴이 창궐하고 있었다. 중국 보건당국은 "광둥성의 괴질은 홍콩조류독감과 관계가 없으며 현재 괴질의 유행도 끝난 상태"라며 파문을 막는 데 급급했지만 괴질은 이미 중국을 벗어나 세계 전역으로 번지고 있었다. 6년만에 재출현한 인체 감염 홍콩조류독감에 놀란 홍콩보건당국은 의료기관을 통한 대규모 폐렴감시체계를 가동했고 뜻밖에도 광둥성에서 유행한 괴질이 홍콩에서도 발생한 사실을 확인했다. 21세기에 출현한 첫 신종 전염병인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가 '괴질'이란 이름으로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수시로 출현하는 신종 전염병
세계가 신종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발표한 세계건강보고서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20년동안 매년 한가지 이상의 신종 전염병이 출현, 지구촌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 신종 전염병 가운데 상당수는 특정지역 내에서 특정집단에만 유행하다 사라지기도 했으나 에이즈처럼 전세계에 번져 박멸이 불가능하게 된 경우도 있다. 또 이들 신종전염병의 상당수는 강력한 독성에도 불구하고 전염력이 제한적이어서 위험성이 덜 인식되기도 한다.
문제는 신종전염병의 세계화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반면 신종전염병의 위험을 차단하는 데 과학기술은 한계가 너무나 명확하다는 점이다. 의료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대규모의 돌연변이를 일으킨 슈퍼독감이 출현할 경우 1억명 이상이 감염되고 65만명 이상이 사망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슈퍼독감의 전조로 판단하고 있는 홍콩조류독감은 감염자가 20여명 안팎이지만 사망자가 8명으로 치사율이 40%에 달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예방백신도 없고 마땅한 치료법도 없다. 만약 홍콩조류독감과 같은 독감이 강력한 전염성까지 얻는다면 이는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엄청난 도전인 동시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WHO나 미국질병통제센터(CDC)가 조류독감의 출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백신개발에 몰두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세대 미생물학교실의 이원영 교수는 "바이러스는 100만번의 번식과정에 1번 꼴로 돌연변이를 일으키기 때문에 홍콩조류독감처럼 종간 벽을 뚫는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염성을 가진 새로운 형태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독성이 순화돼 인간과 공존이 가능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무서운 인수공통 바이러스
1918년 스페인독감 등 20세기 3차례 출현, 수십만에서 수천만명의 인명을 앗아간 슈퍼독감은 모두 조류에서만 존재하다 돌연변이를 일으켜 인간에게 전파된 경우다. 이처럼 종간 벽을 뚫는 경우 독성은 인간에게 치명적이다. 인간이 새로운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인체면역력으로만 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향고양이로부터 유래된 변종코로나바이러스가 원인인 사스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코로나바이러스는 일반감기에 불과하나 종간 벽을 뚫은 코로나바이러스의 치사율은 무려 11%에 달한다. 돼지에만 뇌염을 일으키던 니파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전파된 경우 치사율도 40%대에 달할 만큼 인간의 저항력은 종간 벽을 넘은 바이러스의 공격에 사실상 속수무책이다.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김우주 교수는 "예방백신을 개발하는 데는 현재 과학기술로는 최소 4∼5년이 걸리기 때문에 종간 벽을 뚫은 변종 바이러스에 대해 백신으로 대항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정진황기자 jhchung@hk.co.kr
● 인간 광우병
동족이 죽으면 시체를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던 파푸아뉴기니의 포어족은 '쿠루병'이라는 특이 질환을 갖고 있었다.
이 질환은 운동장애와 근육 무력증 등 인간광우병과 유사한 임상적 특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식인풍습이 없어진 이후 이 질환은 사라졌다.
광우병이 생긴 원인도 이와 비슷하다. 영국에서 발육을 촉진하고 육질을 좋게 하기 위해 죽은 양의 뼈와 내장을 갈아 살아있는 양에게 먹이면서 양에게 광우병과 비슷한 증상의 '스크래피'라는 질환이 나타났다.
사료가격급등과 발육촉진 등의 이유로 초식동물인 소에게 스크래피에 걸린 양의 육질이 포함된 동물성 단백질 사료를 먹인 뒤 1986년 소에게도 같은 증상이 생겨났고 이 소의 부산물로 만든 사료를 다시 소에게 먹이면서 이른바 광우병은 광범위하게 번져갔다. 95년 영국에서 광우병으로 죽은 소고기를 먹은 사람도 뇌가 스폰지처럼 구멍이 뚫려 죽는 사실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불리는 인간광우병이다. 인간광우병은 전염과정과 함께 초식동물에서 나타나는 질환이 잡식동물인 사람에게 옮는 일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이 자연질서를 무너뜨린 결과물로 분석되기도 한다.
김문식 국립보건원장은 "초식동물의 질환이 사람에게 옮겨진 인간광우병은 과학적 상식을 뛰어넘은 전염병"이라고 설명했다.
/정진황기자
예방백신 개발 늦어지는 상황서 검역·격리가 사스 막는데 효과
14세기 유행한 페스트는 유럽인구의 3분의 1을 감소시켰다. 마땅한 치료약이 없는 당시로서 유일한 해법은 검역과 격리였다. 그러나 달에 우주선을 쏘아올린 1960년대 이후 과학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도 승리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나오면서 전염병에 대한 검역과 격리는 사실상 먼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현재 국제보건규약이 규정하는 검역전염병은 페스트 콜레라 황열에 불과하다.
하지만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의 출현은 검역과 격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3월 중순 사스주의보를 내린 세계보건기구(WHO)는 각국에 사스에 대한 검역 및 환자 격리지침을 내렸고 4월2일에는 중국 광둥(廣東)성과 홍콩 등 사스유행지역에 대한 여행제한 권고를 내렸다. WHO 웹사이트를 통해서는 매일 세계 각국의 사스환자통계를 취합, 일일보고를 냈다. WHO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스의 위험성을 지나치게 부각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부 전문가는 중국을 혼내기 위한 국제적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는 현실에서 WHO의 이러한 조치는 세계로 확산된 사스를 차단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결과 역시 성공적이었다. 사스환자는 세계적으로 8,422명에 그쳤다.
사스환자가 세상에 알려진 시점은 올 2월21일 홍콩에서였지만 WHO의 역학조사결과에 따르면 실제 발생은 지난해 11월 중국 광둥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국 보건당국은 사스 초기 사스환자나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었지만 이를 숨기는 데 급급, 지역적 전염병이 삽시간에 세계로 번져나가는 빌미를 제공했다. 중국 보건당국이 환자수 등 사태의 진상을 은폐한 결과는 사실상 엄청난 것이었다. 실제로 사스의 세계적인 유행으로 국제항공노선 승객은 50∼70%나 줄었고 호텔투숙객도 절반 가까이 감소하는 등 세계경제에 미친 여파가 엄청났다. 전염병의 확산은 인간의 광범위한 이동과 수송수단의 발달로 14세기에 비해 수백, 수천배 이상 빨라졌다. 반면 이에 대응한 예방약이나 백신을 신속하게 만들 수 있는 과학적 역량은 없어 검역과 격리는 21세기에 더욱 유효해진 셈이다.
WHO는 최근 발표한 건강보고서의 '사스, 새로운 질병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에서 국제간 전파 위험이 있는 감염질환의 발생에 대해 각국이 지켜야 할 원칙 중 첫번째를 "즉각적이고도 공개적인 발표"라고 천명했다.
/정진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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