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샤워부터 먼저 하고 탕 속에 들어가는 거죠.""그럼, 그래야 물이 덜 더러워지고 다른 손님들에게도 실례가 안 되지."
초등학교 1학년 꼬마는 아빠 옆에 나란히 서서 샤워꼭지를 틀고 몸을 구석구석 닦는다. 30대 초반의 젊은 아빠는 아들을 향해 흐뭇한 눈길을 보낸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지닐 만큼 자란 아들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이다.
둘의 대화를 무심코 들으며 연로한 부친의 등을 밀어주던 중년남자는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다. 그날 따라 부친의 몸피가 유난히 왜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고 꽉 차 보이던 부친의 가슴이 언제부터인가 거둘 것 없는 황량한 들녘처럼 텅 비어 가고 있음이 너무도 안타까운 것이다. 벽을 사이에 둔 여탕 너머로 동네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밀려온다. 때를 밀지 않으려고 요리조리 몸을 빼는 자녀와 실랑이를 벌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에도 즐거움이 실려 있다.
일요일 오후 동네목욕탕 행화탕의 한가로운 삽화다. 목욕탕에서 숨길 것 없이 서로의 알몸을 활짝 드러낸 채 정을 주고 받던 시절이 있었다. 여기에는 그런 정취가 살아 있다. 탈의실 풍경도 마찬가지다. 그 흔한 에어컨도 없다. 아니 전화마저 없다. 시계가 한 세대 전 어느 시점에서 멈추었나 보다. 마포구 아현 3동 행화탕의 주인 박두희(朴斗羲·66)씨의 생김새도 영락없이 마음 좋은 동네아저씨의 전형이다. 선친(朴琮勳·박종훈)에 이어 2대째 목욕탕을 운영하고 있다.
"80년대만 해도 요즘 같은 세밑이나 명절이 다가오면 발 들여놓을 틈도 없이 손님이 많았는데…. 어디 동네 사람들 아니면 누가 우리 같은 허름한 목욕탕을 찾아오겠어요. 서울시내에 시설 좋은 목욕탕이 널려 있는데…." 그렇다고 손님이 없어 걱정하는 낯빛도 아니다.
"이 동네가 20년 가까이 재개발지구로 묶여 있으니 달리 방도가 없어요. 목욕탕 앞에 아파트가 들어설 때 우리도 최신식 시설을 갖춰 새로 지으려고 시도하다 포기했지요. 자식들이 자란 삶의 터전이어서 애착이 컸기 때문입니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헐리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이나 맞으면 좋겠습니다. "
행화탕은 초대형 찜질방과 스파 등이 선도하는 눈부신 목욕문화의 진화대열에서 너무 멀어져 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선 때를 미는 기능만을 가진 목욕탕은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다. 목욕시설이 미용 건강관리 오락의 기능을 두루 갖춘 복합공간으로 사치의 도를 날로 높여가고 있는 마당에 행화탕의 존재는 그래서 더욱 신기하다. 겉 보기에는 그래도 한때는 장안에서 시설 좋고 수질 뛰어난 목욕탕으로 손꼽혔다. 반세기 가까이 마포주민의 곁을 지켜오면서 이제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목욕탕의 위치에 서 있다. 탈의실 벽에는 63년 윤태일 서울시장의 빛 바랜 표창장이 걸려 있다. 위생상태가 청결하고 좋다는 내용이다.
박씨의 선친이 행화탕을 사들인 때는 60년대 초. 양조장을 경영하던 선친은 정주(옛 정읍)의 신태인 중고를 인수할 정도로 재력가였다. 4남2녀의 둘째인 박씨의 몫으로 행화탕을 챙겨준 것이다. 목욕탕을 포함, 대지 140평이 넘는 2층 양옥은 서울에서도 드문 고급주택이었다. 원소유자였던 서울시의 고위 공무원 출신이 이민을 가면서 넘긴 것이다. 박씨가 행화탕 운영을 맡은 지는 올해로 23년째. 그 전에는 부인이 꾸려갔다. 박씨는 그 사이 부산에서 '부산제당'이라는 중소기업을 경영했지만 경쟁에서 버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행화탕은 말 그대로 동네의 사랑방 역할을 해왔다. 박씨의 선친과 친구처럼 지내던 단골 손님 대부분은 벌써 세상을 떠났다. 이젠 박씨의 친구들이 그 자리를 메운다. 나들이가 자유롭지 않은 박씨의 입장을 고려해 가끔 목욕탕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새벽 5시반부터 저녁 8시까지 문을 열지만 평일에는 많아야 열 대여섯명, 휴일에도 30, 40명에 불과하다. 물론 남녀탕을 합친 손님이다. 그런 세월이 꽤 오래됐다. 그나마 자기 건물이라 유지가 가능하다. 종업원도 없다. 모든 일을 박씨 혼자서 다 한다. 20년 넘게 목욕탕 창구를 지키고 있다 보니 변해가는 세태를 실감하게 된다. 예전에는 할아버지 아들 손자 3대가 함께 오는 경우도 흔했다. 지금은 아예 없다.
박씨도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이 무척 답답한 눈치다. 전주고와 중앙대 정치학과를 나온 그는 한때 정치에 몸 담을 생각을 갖기도 했었다. 열린 우리당의 김원기 공동대표는 고교 선배로 박씨의 집안과 세교를 나누고 있다. 박씨는 뭔가 말을 하고 싶어하면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그의 생각을 대신 옮기면 이렇지 않을까. '국민을 외면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을 데려다 때를 벗겨주었으면 좋겠다.'
아마 모든 국민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조상은 목욕을 몸뿐 아니라 마음을 닦는 의식으로 여겨왔다. 그래서 정신목욕도 발달했다. 목욕재계는 물론이고 악담을 들으면 귀를 씻는 세이(洗耳), 못 볼 것을 보면 눈을 씻는 세안(洗眼)은 모두 바르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세밑이다. 올 한해 국민에게 상처만 준 정치인들이여 마음의 때, 양심의 때를 씻어내고 갑신(甲申)년 새해를 맞이함이 어떨까.
이기창 편집위원 lkc@hk.co.kr
도움말 김용범(소설가)
■최초의 공중 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 들어서
돈을 내고 목욕을 할 수 있는 공중목욕탕이 한국에 등장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서구인들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호텔과 여관도 늘어났다. 숙박업소마다 목욕탕을 설치했는데 1910년 이후 자리잡은 이러한 관행이 오늘날 숙박업소에서 대중탕을 부대시설로 갖추게 된 계기가 된다. 또 다른 변화는 일본인의 대거 이주에서 비롯된다. 공중목욕탕 설치를 시도한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반발에 부딪쳐야 했다. 유교적 전통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여러 사람이 한 곳에서 목욕을 하는 것을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국내 최초의 공중목욕탕은 1924년 평양에 들어섰고 시에서 운영을 했다. 이듬해 서울에도 공중목욕탕이 세워졌다. 이런 영향을 받아 광복 후 한동안 복지시설로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목욕탕을 지어 공무원이 운영과 관리를 맡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민족은 목욕을 육체의 청결은 물론 질병치료와 의식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해왔다. 문헌상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왕비 알영의 목욕이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박혁거세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이다. 남달리 아름다웠던 알영은 입술이 닭의 벼슬과 비슷한 흠이 있었지만 북천(北川)에서 목욕을 한 뒤 완벽한 미인으로 변했다. 목욕재계(沐浴齋戒)를 계율로 삼는 불교의 전래는 목욕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절에는 공중목욕탕이 설치됐고 일반가정에도 목욕시설을 갖췄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려인들은 신라인들보다 더 자주 목욕을 했다. 귀족층에서는 어린아이의 피부를 희게 하기 위해 복숭아꽃물을 이용했다. 성인 남녀는 모두 난초를 삶은 난탕을 이용했다. 조선시대에는 특히 제례 전에 반드시 목욕재계하는 관습을 지켰다. 대갓집에서는 목욕시설인 정방(淨房)을 설치했다. 목욕물에 섞는 재료도 더욱 다양해졌다. 난탕은 물론이고 인삼잎을 달인 삼탕, 창포 잎을 삶은 창포탕, 복숭아잎탕, 마늘탕 등을 이용해 피부를 가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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