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거의 다 저물었다. 새해를 준비하고 한해를 정리하는 중에 책장을 보니 책을 절반 가량 밀쳐내고 DVD타이틀이 수북히 꽂혀있는 걸 문득 발견하게 된다. 수백장에 달하는 DVD 제목을 눈으로 일일이 보면서 인상 깊었던 영상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특별판(SE)' DVD에서는 뉴욕 뒷골목의 풍경이 펼쳐지고 '로마의 휴일 SE'에서는 멈춰서서 로마 시내를 구경하는 앤 공주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보인다. 감명깊게 읽었던 책을 보면 가슴을 파고 드는 좋은 문구가 기억나게 마련이듯 DVD 역시 영화를 감상하면서 인생을 느끼게 해준 명장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생생하게 살아난다.
올해도 틈틈이 한두 장씩 사 모은 DVD타이틀이 책장에 제법 쌓여있는 걸 보면 좋은 영화와 음악이 내 삶에 힘이 되고 휴식이 되는 인생의 참고서라는 생각에 뿌듯해진다. 한번 살고 지나가 버리면 그 뿐인 인생, 더 많은 경험을 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기도 하다.
DVD는 어쩌면 우리가 가보지 못한 곳을 보여주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감정과 행동을 가르쳐주는 이야기꾼이 아닐까. 또한 정신없이 지나쳐온 삶을 정리해주고 영화의 주인공과 비교해주는 역할도 한다. 때론 지친 삶을 달래주고 활력을 주는 친구를 자처하기도 한다. '매트릭스' '반지의 제왕' 같은 SF영화나 '니모를 찾아서' '이웃집 토토로' 등의 애니메이션은 나이가 들수록 떨어지는 상상력과 호기심을 자극하고 윤이 나게 해준다.
가득 쌓여가는 DVD를 볼 때마다 그 동안 DVD를 모으고 향유하는 특유의 재미와 감동이 진하게 남지만 아쉬움도 묻어난다. 올해만 해도 예약까지 해가며 어렵게 구한 DVD가 곧바로 반값 할인 제품으로 전락하거나 DVD를 잘못 제작해 일일이 교환해야 하는 불편까지 겪어야 했던 리콜 사건이 꽤 있었다. 이런 일로 한 장의 DVD가 주는 소박한 행복과 편안함이 여지없이 무너질 때마다 그 속상함을 이루 말도 다할 수 없다. DVD 기획과 제작을 맡고 있는 업체들은 새해에 나 같은 DVD 애호가가 이런 안타까움을 다신 겪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4년 갑신년 새해에도 굵직굵직한 DVD가 속속 나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들 DVD에는 영화와 함께 과연 어떤 흥미로운 볼거리와 뒷얘기들이 담겨질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이러다가 내년 말에는 아예 책장이 DVD로만 채워지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아무튼 DVD와 영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새해 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이 됐다. 'Merry DVD & Happy New Year!'
/DVD 칼럼니스트 kim@journalis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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