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제주도 한라산 자락에서 한란(寒蘭)이 꽃을 피웠다고 합니다. 한란은 대표적인 겨울꽃이고, 이름도 추울 때 피는 꽃을 뜻합니다. 한란은 은은하고 그윽한 향기가 있어 흔히 청향(淸香)이라고도 합니다. 눈감고 그 모습을 떠올려보니 정말 그 맑은 향기가 전해져 오는 듯합니다.한란의 개화가 화제가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기 때문입니다. 제주도 한라산의 일부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한란이 저절로 자라는 유일한 자생지입니다. 워낙 귀한 곳(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생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이라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돼 있고, 한란을 채취하면 식물훼손으로 받을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처벌을 받습니다. 자생지 주변은 철통같은 수비로 도둑의 손길을 근본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한란의 기품과는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울타리를 하고 있어 안타깝기도 하지만, 금고 속에 보존되고 있는 고려청자 같은 국보와 같은 맥락에서 생각하시면 될 듯합니다.
한란을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개체 수는 많지 않으니 자연히 자생지에서도 점점 줄어들었고 그 희소성으로 인해 값은 더욱 높아졌죠. 그럴수록 자생지의 한란은 더욱 위태로워지는 악순환이 거듭되다가 조직배양 기술이 도입되면서 이제 한란은 제주도 꽃집에서 살 수 있는 꽃이 되었습니다.
식물들은 많은 세포가 모여 조직을 이루고 이들이 다시 기관을 형성하며 이러한 기관은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지며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조직배양이란 이런 식물체 중의 일부(세포나 조직)를 떼어 균이 없는 상태에서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기관을 분화시키는, 쉽게 말해 인공적으로 복제품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여기서도 식물이 동물보다 우월한 점이 나타납니다. 동물의 경우는 특정한 세포나 조직을 배양하면 그 부분만을 무한정으로 증식할 수 있지만, 식물은 어떤 조직에서 시작하든, 예를 들어 어린 싹 끝을 조금 떼내 배양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온전한 식물체가 만들어집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식물의 조직배양은 생각보다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값비싼 난초들을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기술 덕분입니다. 감자나 딸기, 튤립 같이 바이러스에 잘 노출돼 어려움을 겪는 농작물의 어린 묘(苗)들도 이를 통해 생산해서 공급하지요.
최근에는 식물체를 온전하게 만들기 전에 주목나무에서 추출된 택솔이라는 항암성분이나 산삼의 성분처럼 특별한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 상태를 대량으로 증식해 필요한 부분을 추출, 의약품으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자연의 이치를 조금씩 엿보아 가는 것이 오늘날의 과학인 듯 한데, 섣부른 흉내내기가 더 큰 어려움을 불러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듯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말 그대로 자연 속에서 자연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니까요.
이제 한해의 끝자락 입니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외롭고 쓸쓸할 것만 같은 그 숲의 한 켠에서 그토록 단아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꽃을 피우는 한란처럼, 힘겨웠지만 소중한 한해로 꽃피워 지길 기원합니다.
이 유 미 국립수목원 연구관 ymlee99@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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