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면 여론을 읽을 수 있다. 택시 기사들을 통해 듣는 요즘 민심은 흉흉하다. 그들은 "세상이 확 뒤집어져야 한다"거나 "국회의사당을 폭파해야 한다"는 등의 극언을 서슴지 않는다.불경기 속에 잇달아 터진 불법 정치자금 사건들은 걷잡을 수 없이 민심을 악화시키고 있다. 수십억, 수백억을 먹고도 큰 소리치는 '도둑들의 잔치'는 생활고를 겪고 있는 서민들에게 삶의 의욕마저 빼앗아가고 있다. 연말경기까지 실종된 싸늘한 세모에 증오만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다.
죄 지은 국민들을 추상같이 단죄하던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가 불법자금을 가득 실은 트럭을 '차떼기'로 넘겨받아 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은 절망감을 더해 준다. 돈과 권력 앞에서는 어느 한 사람 믿을 사람이 없다는 허탈감이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던 많은 사람들의 꿈이었다. 정치경력과 교육배경, 언행까지도 '주류'가 아닌 그에게 쏠렸던 열망의 실체는 기존의 주류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었다. 주류가 하지 못하는 일을 그가 할 수 있으리라고 지지자들은 기대했다.
그 소망은 아직도 노무현을 향해 열려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대선 1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면 노 후보를 찍었던 사람들 중 절반 내외가 자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응답했다.
노 대통령은 당선 1주년을 축하하는 노사모 집회에서 '시민혁명'을 외쳤는데, 그 외침은 공허하고 초라했다.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저녁, 야외집회에 모인 지지자는 숫자로나 열기로나 대선 때와 비교가 안 됐다. "2급수는 3급수보다 깨끗하다"는 대통령의 궤변은 1년 전 화려했던 대선 연설을 부끄럽게 했다.
우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실망스런 정치를 견뎌야 할까. 국민은 이제 정치발전 자체에 회의를 품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중에 그의 아들이 불법자금에 연루되어 구속되자 "대통령 아들을 감옥에 보낼 만큼 민주주의가 성장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사건은 교훈이 되지 못했다.
한평생 야당생활을 하며 누구보다 정치부패를 규탄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재임 중에 그의 두 아들이 뇌물사건으로 감옥에 가는 불행을 겪었다. 그리고 그의 측근들은 겁없이 마구 돈을 먹어 불법자금 규모를 수 백억원 대로 키웠다. 민주화가 권력을 덜 부패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역설하고 있다. 자신이 관련된 불법자금은 다른 정권 또는 다른 정당에 비해 규모가 적고, 또 임기 초에 측근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달라는 것이다. 지금은 2급수지만 1급수가 되려고 노력할 테니 싸잡아 매도하지 말고 도와달라는 것이다.
"레임덕도 오기 전에 대통령 측근이 줄줄이 구속될 만큼 정권이 탈 권위적임을 인정해 달라"는 말은 "대통령 아들을 감옥에 보낼 만큼 민주주의가 성장했다"는 말과 비슷하다. 국민은 이제 그런 말에 속지 않는다.
핵심은 당사자들이 정치부패에 대해서 얼마나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정치개혁의 필요성을 얼마나 절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정치판에서 그런 움직임을 발견하기 어렵다. 개혁, 개혁하지만 당리당략과 자신의 밥그릇 앞에서는 모든 구호가 무색해진다.
2003년 새 정부 출범을 계기로 정치개혁을 갈망했던 국민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주류'에 대한 지겨움으로 '비주류'를 대통령으로 선택했던 유권자들의 기대는 또 다른 지겨움으로 바뀌고 있다.
시중에선 "국회를 폭파해야 한다"는 막말이 쏟아지는데, 국회에선 선거법 개정안을 놓고 여야가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범국민정치개혁협의회가 만든 개혁안은 국회정치개혁특위로 넘어간 후 개악(改惡) 소리를 들을 만큼 후퇴했고, 국민의 관심이 가장 큰 정치자금법안은 아직 논의조차 안하고 있다.
지진으로 참변을 겪고 있는 이란의 피해 현장에서 한 여인이 "오, 하느님! 대답하세요"라고 절규하고 있었다. 우리도 외치고 싶다. "오, 하느님! 대답해 주세요. 국회를 폭파하는 것 이외에 정말 다른 길이 없나요?"라고. 2003년이 아쉽게 안타깝게 막을 내리고 있다.
/본사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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