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이 송년 기사인만큼 인물 선정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어쨌든 나름대로는 그를 통해 일년을 결산할만한 사람이어야 하는데 누굴 고르든 보편적인 대표성을 갖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 동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이들이 외견상 평범한 듯 했어도 사실은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었므로.내내 머리를 싸 쥔 끝에 마침내 딱 무릎을 칠만한 인물을 찾아냈다. 우리의 서민 '이천삼'씨다. (눈치 빠른 이들은 바로 알아챘으리라. 그가 가상인물 '2003'씨임을) 3년 전 본지에서 통계청의 협조로 '평균 한국인'을 찾아낸 적이 있었다. 서울 변두리 연립주택에 사는 지방 출신의 마흔 살 된 아저씨였다. 전문대를 나와 작은 토목회사에서 200만원 남짓 봉급을 받는 평범한 남편이자 두 딸의 아빠이기도 한.
이천삼씨도 그런 사람으로 해두자. 아니, 어쩌면 조건이 그보다 좀 못한 게 맞겠다. 최근 우리네 살림살이란 게 그저 내리막길 뿐이었으니. 그의 집 근처 포장마차 쯤으로 배경을 설정해놓고 그의 한해 넋두리를 들어보자. (술취하면 대개 얘기가 장황해지는 법이니 다소의 인내심은 필요할 터이다)
올 일년 어땠는지 얘기해 보라고요? 그에 앞서 먼저 물어봅시다. 올해 괜찮았다고 하는 사람 만나본 적 있어요? 내 주변이야 다 나 같은 서민 뿐이어서 그런지 그런 얘기는 통 못 들어봤어요. 그래도 연말이어서 망년회랍시고 몇 번 가봤는데…. 영 우울합디다. "IMF때도 이렇지는 않았다"하는 엄살을 늘 들어오긴 했지만 이번에는 '정말, 진짜로' 뭐 이런 말이 꼭 붙더라구요. 하기야 그 때는 벤처네, 주식이네 하면서 한구석에서 쏠쏠하게 재미본 친구들이라도 있었지요.
올해가 더 갑갑했던 데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을 거에요. IMF 때야 "이게 바닥이다. 더 내려갈 데는 없다"고 생각했잖아요. 또 시한(時限)이 있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여전히 바닥은 끝이 없어 보이고, 견뎌야 할 시한이란 것도 없더라 이겁니다. 다들 무서워지기 시작한 거지요. 왜 저 앞에 터널 끝이 전혀 안 보일 때, 이게 어디까지 뻗어있는지 통 모를 때 드는 공포감 있잖아요.
일반적인 분위기 말고 난 어땠냐고요? 뭐 그럭저럭 지낸 셈이지요. 무엇보다 식구들이 별 탈없이 지내줬으니까요. 애들이 고등학교, 중학교 올라가서 밤 늦도록 학원 다니느라 얼굴 볼 시간이 없어진 게 아쉽긴 하지만. 더 비싼 과외 못 시키고 동네 애들 바글바글한 학원 보내는 게 미안하긴 한데, 어떡합니까. 그나마도 최소한도로 먹을 것 입을 것만 빼고 다 털어넣는 건데. 그나 저나 우리들 고생은 그렇다 쳐도 '쟤들도 이제 전쟁터에 발을 디뎠구나' 생각하면 안됐어요. 저러고 밤 12시, 1시까지 꼬박 공부하고, 그렇게 용케 대학을 들어가봐야 제 밥벌이라도 할 지…. 요즘 버젓한 대학 나와서도 태반이 집에서 눈치밥 먹고 있다잖습니까.
그러니 나 같은 늙다리야 아직 쫓겨나지 않고 알량한 봉급이나마 받고있는 게 감지덕지지요. 새해에는 나라경제가 나아질 거라고 하니까 다소 위안은 되지만… 이대로 내년까지 가면 거리로 나앉아야지요. 참, 그런데 내 나이에 스스로 늙다리 소리가 이렇게 아무렇지않게 튀어나오는 게 될 말입니까? 전 같으면 한창 전성기를 향해 치달을 나이인데…. 요샌 친구들끼리도 당연하게 서로를 퇴물취급합니다. 하여간 기막힌 세상이에요. 그런데 선생, 내년 봄 총선 끝나고 나면 진짜 사정이 좀 나아질까요?
선거 얘기난 김에 정치얘기 좀 해봅시다. 우리네야 당장 먹을 게 없어도 그 얘기는 죽어도 안 빠뜨리니깐. 거 왜 노숙자들 대화에서도 제일 단골화제가 정치라잖아요. 사실 그 얘기하는 심리야 뻔하지요. 제일 만만한 화풀이 대상인데다 잘난 사람들 씹어대는 맛도 괜찮고… 또 따지고 보면 저 못나 이렇게 사는 데 대한 핑계도 되잖아요.
어쨌든 새해 벽두는 진짜 근사했어요. 자란 형편이 나랑 별로 다를 게 없어보이는 양반이 뽑혔잖아요. 집안이고, 학벌이고 크게 기댈 데 없이 얼굴에도 초년고생 티가 역력한. '야, 이제 뭔가 크게 바뀌겠구나'하는 생각에 신이 납디다. 더 나빠질 건덕지가 없으니 바뀐다면 무조건 나을 거라고 믿었던 거지요. 예? 그래서 작년에 그분 찍었냐고요? 헤헤… 사실 그렇진 않았어요. 이 나이 먹으면 간이 작아져 그런지 큰 변화는 왠지 겁나더라구요. 맨날 해먹던 부류의 인간들이 또 해먹는다는 게 떨떠름하긴 했지만. 하여튼 그랬는데… 지금은 한숨만 나옵니다. 내내 갈팡질팡하면서 싸움만 해대는 통에 정신만 산란했지 뭐가 나아진 게 있습니까. 며칠 전 시민혁명 얘기 때문에 또 한바탕 시끄러운데, 이거 도리어 우리네가 서민혁명이라도 해야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더 화나는 건 그거에요. 학연, 인맥으로 저희들끼리 얼키고 설켜있는 이들과 달리 이 양반은 서발 장대 휘둘러 걸리는 데 하나없이 자유로울 줄 알았잖아요. 아이고, 요새 주변 인물들이 줄줄이 들어가고 "나는 10분의 1도 안받았네"하는 걸 보면 기가 찹니다. 뭐 그렇다고 다른 양반이 됐다면 더 나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그 사람들 돈을 차떼기까지 하고도 뻔뻔한 걸 보면 더 억장이 무너질 뻔 했어요. 그러니 우리네 팔자려니 해야지요. 원래는 국민들을 잘 보듬겠다고 약속한 양반인데 이젠 거꾸로 우리가 잘 어르고 달래서 가야할 판이니, 원.
하지만 한편으론 세월의 흐름하고도 관계가 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은 듭디다. 아, 말이 났으니 말이지 지금 우리 국민들이 한 줄로 서라면 섭니까? 분명한 정책 정해서 "자, 다같이 이 길로 전진!"하면 다들 그렇게 따르겠냐고요. 전체적인 효율성만으로 설득할 수 있을 때는 지났지요. 그러니 그 양반 헤매는 것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라는 겁니다. 글쎄, 시대 탓도 있다니까요.
에이, 그 얘긴 그만 할랍니다. 기분만 더 언짢아질 뿐이고. 그런데 올핸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기억이 떠오르지 않네요. 한 해 전체가 잿빛으로 덧칠된 느낌입니다. 아마 유난히 죽음에 많이 접해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해요. 생각해 보세요. 설날 고향 다녀온 기분에서 채 깨어나기도 전에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났잖아요. 연일 신문 방송에서 보도하는 희생자 가족들의 사연과 통곡에 함께 눈물 짓느라 봄이 봄 같지도 않았던 것 기억납니까?
아무튼 죽음이 올해처럼 일상적으로 사회적 이슈가 된 적도 없었던 것 같아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의 자살 때는 나라 전체가 온통 두 편으로 갈려 시끄러웠지요, 현대아산 정몽헌 회장의 자살 때는 또 어땠습니까. 그 뿐인가요. 일년 내내 카드빚으로 목숨을 끊은 이들, 심지어 애들까지 데리고 동반자살하는 일이 줄을 이었는가 하면, 성적 취업 때문에 채 피지도 못한 삶을 마감한 꽃다운 청춘은 얼마나 많았습니까. 얼마 전에도 명색이 아빠란 자가 어린 제 아이 둘을 그 차디찬 한강에다 던진 일도 있었잖아요. 그 아이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편이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파옵니다. 그래요. 그러고 보니까 정말 올핸 '죽음의 해'였네요. 유식한 분들은 이럴 때 사회 안전망의 미비니 하는 말을 씁디다만, 어찌해 볼 수도 없다는 절망감이 사회 여기저기에 가득 차 있다는 얘기 아니겠어요?
그런데 정말 하고싶은 얘기는 이거에요. 정작 우리부터가 문제라는 말입니다. 다들 눈 앞에 손톱만한 이득만 보여도 규칙이고, 약속이고 다 던져버리고 사는 데 누가 누구를 욕하겠어요. 그렇지 않다구요? 참 내, 당장 차 몰고 길에만 나가 보세요. 고작 몇 대 앞질러보겠다고, 다음 신호까지 못 기다리겠다고, 틈만 나면 차선이고 신호고 위반해대잖아요. 혼자서 별 짓 다하다가 때 되면 짐짓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정치인들 욕하면서 핏대 세우고…. 웃기는 일이지요. 그 밥에야 그 나물이 어울리는 법 아닙니까. 부끄럽지만 나도 크게 다를 거 없지요.
하여튼 재미라곤 없이 한해를 보냈네요. 작년에는 그나마 월드컵 축구라도 있어 큰 위안이 됐었는데…. 그 땐 나도 아이들하고 붉은 티셔츠 입고 거리에 나가 소리쳐댔는데, 벌써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게 아득하네요. 한 마디로 일년 내내 뭐가 뭔지 모른 채 헤매고 다닌 기분입니다. 그게 새로운 길 찾기를 위한 혼란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아무 방향 없는 혼돈이었는지….
아이고, 이제 술도 취했으니 그만 일어섭시다. 잠든 우리 새끼들 이마에다 뽀뽀라도 해줘야지요. 밤안개가 자욱해 그런가? 통 어디가 어딘지 안 보이네요. 선생도 이 속에서 길 잃지 말고 조심해 가세요.
/편집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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