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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5> 잊지 못할 관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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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무대의 카리스마 박정자 <25> 잊지 못할 관객들

입력
2003.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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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0순위라고 서슴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남편도 아이들도 아니다. 관객이 바로 그들이다. 연극은 관객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 공연이 있기 전 나는 늘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한 관객들과도 때로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한다. '연극을 뭘로 보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일부 관객들 탓이다.1992년 대선 전이었다. 운니동 실험극장에서 '신의 아그네스'를 장장 8개월간 장기 공연하고 있을 때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리 표를 스무 장이나 사서 이희호 여사와 함께 극장에 왔다. 워낙 손숙과 잘 아는 사이이기도 했지만. 나는 분장실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무대 위에서 저벅저벅 구두 소리가 나는 게 아닌가. 그들 일행이 극장에 들어오는 때를 맞춰 카메라맨들이 무대에서 스탠바이를 하고 있는 거였다. 나는 소리를 쳤다. "관객이 저희 뿐이야? 이게 무슨 망나니 같은 짓거리야! 말도 안 되는 짓 하지 말라고 해." 정당 당수고 대통령 후보고 다 좋다, 그러나 극장에 오면 관객은 관객대로의 매너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카메라맨의 그 과도한 제스처를 그가 원하기나 했을까?

공연이 끝나고 김 전 대통령은 우리 모두에게 저녁을 샀다. 즐거웠다.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올 만큼. 그는 말했다. "박정자 씨는 무대 위에선 아주 크게 보이는데 실제로 보니 참 작군요." 그런 말은 그 자리에 동석한 노무현 현 대통령도 했다. 무대 위에서 그렇게 커 보이더니 이렇게 보니까 아주 작다고. 무대라는 건 그렇게 뭐든 커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옛날 내가 무대를 올려다볼 때처럼.

그런가 하면 아주 색다른 방식으로 배우를 서글프게 하는 관객들도 있다. 공연 30분이 지나서 헐레벌떡 극장을 쳐들어오는 사람들, 무대 위에 배우를 세워놓고 자신들끼리 잡담을 주고 받으며 한 편의 연극 공연을 시도하는 이들. 갖가지 연극 훼방꾼 중에서도 당연 으뜸은 공연 도중에 코를 골며 잤던 중년 사내였다. 마찬가지로 '신의 아그네스'를 공연할 때였다. 왠 중년 사내가 연극 1막이 끝나도록 계속 코를 골며 잠을 잤다. 그것도 일부러 눈에 띄길 바라는 것처럼 앞에서 세 번째인가 네 번째 자리에서. 공연 중이라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1막이 끝난 후 무대감독을 시켜 과감히 그를 극장에서 퇴출시킬 계획이었다. 그런데 웬걸, 손숙이 자기가 아는 손님이라는 거였다.

꾹꾹 참는 수밖에 없었다. 연극이 끝나고 손숙과 함께 로비에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할 때였다. 문제의 그 사내가 우리에게 와서 인사를 건넸다. 나는 눙치고 물었다. "연극 어떠셨어요? 재미있게 보셨어요?"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 그 자체였다. "감동적이었어요." 감동적이라니, 세상에 맙소사. 손숙의 손님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나는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테레사의 꿈'을 공연할 때는 더 기막힌 일도 경험했다. 기자들을 상대로 시연회를 하는 중이었다. 한참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데 객석에 큰 대 자로 뻗어 잠을 자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울컥, 화가 치밀었다. 시연회가 끝나고 사진 촬영 시간이었다. 꿈나라에서 공자를 열심히 만나고 있던 사내가 카메라를 들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알고 보니 신문사 기자였다. 그는 내게 포즈를 취해달라고 했고 내 대답은 뻔했다. "찍긴 뭘 찍어요. 자려면 여관 가서 자요." 나는 난리를 쳤다. 그는 몇 번을 사과하고서야 사진을 찍었다.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관객을 바로 눈 앞에 두고 하는 예술이다.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순간에 관객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공연을 망쳐버린다. 이 자리를 빌어 내가 입에 달고 사는 캐치프레이즈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좋은 관객이 좋은 연극을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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