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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2·끝> 6월 항쟁을 생각한다 ― 한승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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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발자취-6·3사태에서 6월항쟁까지]<32·끝> 6월 항쟁을 생각한다 ― 한승헌 변호사

입력
2003.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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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민의 힘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가 야권의 분열로 '죽 쒀서 개 뒷바라지 한 꼴'이 되었습니다."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로서 '6월 항쟁'의 일익을 담당했던 한승헌(韓勝憲·69·전 감사원장) 변호사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며 거듭 아쉬움을 드러냈다. "6월 항쟁의 최대 과실로 인식된 '6·29 선언'은 결국 군사독재 정권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꺼내 든 구호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전 국민은 김영삼 김대중씨가 주도하는 대통령선거에 정신을 잃었지요. 당시 군부는 양김(金)씨의 후보단일화가 성사되지 않는 쪽에 승부를 걸었고, 결국 그들이 승리한 셈이 됐습니다. '6·29 선언' 8개 항 가운데 대통령직선제 개헌 외에 지켜진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등 진정한 민주화의 길은 또 한번 연기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그렇다고 '6월 항쟁'의 의미가 퇴색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 물론입니다. 한국의 민주화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4·19 이후 72년 유신체제에 이르기까지 민주화 운동은 대학생 등 지식인 중심으로 전개됐습니다. 이후 80년을 전후해서 근로자와 종교단체가 가담하고, 교육자 여성단체의 참여가 확대됐지요. 6월 항쟁의 특징은 여기에 중산층 일반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반정부 시위의 폭이 전국적, 전계층으로 일반화했다는 것입니다."

― 결정적인 기폭제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었지요.

"박정희 정권을 계승한 전두환 군사독재의 상징인 고문수사와 용공조작이 백일하에 드러났지요. 국민의 의분에 전두환 정권의 '4·13 호헌 조치'가 기름을 부은 격이 됐습니다.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의거 7주기 추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조직적인 은폐·축소·조작을 폭로한 것이 불을 당긴 격이 됐습니다. 모든 민주화 세력이 모여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한 것은 필연적이었지요. 국민운동본부는 6·10 시위를 예고했고, 그 이름을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로 지었습니다. 지극히 적확한 표현이었습니다. 또 국민대회 전날 연세대에서 열린 대학생들의 출정식에서 이한열군이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사건도 또 다른 기폭제가 됐습니다."

― 예고된 '6·10 국민대회'는 경찰의 대대적인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호응을 받았습니다.

"당시 통합 재야단체인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비롯한 25개 사회단체, 종교계, 정당 대표 등 2,200명 이상이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신부, 문익환 목사, 막 창당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와 연금 상태인 김대중씨 등이 고문으로 추대됐습니다. 대한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74명이 참여하는 등 변호사와 의사 등 운동권과 거리가 있다고 여겨졌던 단체들도 조직적으로 동참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는 하기식 때 애국가 부르기, 자동차 경적 울리기, 교회와 절의 타종, 연행에 응하고 묵비권 행사하기 등 행동요령을 발표했고 시민들이 철저히 호응했습니다. 그 날은 전두환 대통령이 총재인 민정당 전당대회에서 전 대통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5공의 후계자로 선포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전국 22개 지역에서 40여만명이 참가한 시위는 경찰병력 6만여명으로 감당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울의 경우 경찰진압에 밀린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갔고 이어 15일까지 농성을 하면서 6월 항쟁의 불씨를 보존했습니다. 국민운동본부는 이어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하면서 평화적 시위의 흐름을 이어갔습니다."

― 당시 우리는 그것을 진정한 시민혁명이라 불렀습니다.

"변호사들이 단체로 가두시위에 참가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피고인은 변호사를 잘 만나야 하듯이 변호사도 피고인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들이나 친구의 친구들의 변호를 많이 맡다 보니 어느새 인권변호사가 돼 있었습니다만 가두시위는 처음이었습니다. 6·10 국민대회 전날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 가택연금을 피해 밖에서 지내고 곧바로 집결지인 성공회 성당으로 갔습니다. 입구에서 소위 백골단이라는 진압경찰의 제지를 받았지요. 하지만 그들도 시민들을 심하게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미 대세가 기운 것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날 밤새 경찰서 구치소를 찾아다니며 '변호사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신분과 계층에 관계없이 모든 시민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체감을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시민혁명의 원동력입니다. 시민혁명에는 감동과 눈물이 필요합니다."

― 26일의 '평화대행진'은 그 시행 여부를 놓고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국민운동본부 지도부에서 '6·10 국민대회'의 성과를 평가하면서 제2의 국민대회 개최 여부를 논의했습니다. 그 자리서 통일민주당 인사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신중론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24일로 예정된 전 대통령과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회동에 기대를 거는 눈치였지요. 통일민주당은 '충정은 이해하나 시위는 자제해 달라'는 성명을 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재야인사들은 대부분 회동의 결과가 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23일 국민운동본부는 '6·26 평화대행진' 강행 의지를 발표했습니다. 전 대통령과 김 총재의 24일 회동은 예상했던 대로 별다른 합의를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정치권은 '4·13 호헌조치 철회'를 근간으로 하는 소극적이고 점진적인 개헌논의 쪽으로 대화국면을 끌고 가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6·29 선언'이 발표되자마자 정치권은 국민운동본부 그룹에서 자연스럽게 빠져 나갔습니다. 6월 항쟁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후 7월과 8월 이른바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졌지만 제대로 과실을 맺지 못하는 한 원인이 됐습니다."

한 변호사는 6월 항쟁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 "독재권력이 너무 강해 법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정리했다. 그는 "국민운동본부의 고문으로 추대됐던 두 사람이 이후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맡아 독재권력을 소멸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면서도 "아직도 법치가 확립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6월 항쟁은 미완성이다"고 말했다. 한 변호사는 특히 최근 들어 법치가 확립되지 않은 민주주의의 취약점이 모든 방면에서 드러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자유권적 기본권을 획득하는데는 성공했으나 사회권적 기본권을 확보하는데는 실패했고, 그 실패는 점점 더 심각해 지고 있다"고 말했다.

정병진 편집위원 bjjung@hk.co.kr

● 약력

1934년 전북 진안(鎭安) 출생

전주북중·전주고·전북대 법대 졸업

57년 사법고시 합격. 군법무관, 부산·서울지검 검사

75년 '어떤 조사' 필화사건으로 반공법 위반 구속, 변호사 자격 박탈

80년 김대중내란음모 사건 관련 구속

83년 8월 사면 복권

86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창립

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89년 '씨알의 소리'편집위원

94년 동학농민기념사업회 이사장

99년 감사원 원장

99년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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