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오후, 예전에 일했던 신문사의 문학 담당 기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 선배, 오늘 아침자 조선일보 보셨어요?" "안 봤는데요." "선배 소설집이 동인문학상 후보에 올랐던데요." "그래요? 별일이군요." "어떡하실 거에요?" "글쎄요, 기사를 못 읽었으니…" "그럼 기사 읽어보세요. 제가 저녁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다시 전화할 건 없고, 해 가기 전에 술 한 잔 합시다."어떻게 하겠느냐고 그 후배 기자가 내게 물은 것은 내가 조선일보에 대해, 그리고 그 신문이 운영하는 동인문학상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것을 그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조선일보를 보지 않는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학을 뗀 이래 줄곧 그랬으니, 꽉 찬 6년을 조선일보 없는 세상에서 살아온 셈이다. 집에서만이 아니라 직장에서도 나는 이 신문을 보지 않는다. 아침에 내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이는 신문은, 내가 매일 한 귀퉁이를 짧은 칼럼으로 채우는 한국일보를 제외하면, 흔히 '한경대'라고 불리는 비교적 중도적인 매체들이 전부다.
언론계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처지에, 우리 사회에서 실팍한 영향력을 지닌 신문을 아예 외면하는 것은 직업적 불성실이라 비판 받을 만도 하다. 그러나 나는, 세칭 안티조선 운동에 공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조선일보에 아예 무관심해지는 것이 그 신문을 꼼꼼히 읽으며 비판하는 것 못지않은 효과적 실천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는 왜 안티조선 운동에 공감하는가?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썼듯, 그 신문이 수구 냉전 복고세력의 선전국일 뿐만 아니라, 신문 지면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기 쉬운 글쓰기의 권력화를 가장 비도덕적으로, 현저히 정치적으로 드러내왔다는 판단 때문이다. 나는 왜 동인문학상에 비판적인가? 역시 다른 자리에서 지적했듯 그 상이, 특히 심사위원단의 종신화와 상금의 파격적 인상 그리고 상시적 독회 평가의 기사화를 뼈대로 한 세 해전의 체제 개편 이래, 한국 문단에 대한 조선일보의 아귀 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후배 기자와 통화를 마치고 자료실로 가 참으로 오랜만에 조선일보를 펼쳐 보았다. 문화부 김광일 기자의 이름을 단 그 기사에서는 호의가 배어났다. 그 기사의 호의적 분위기는 나 자신 겁 없이 덜컥 내놓고 부끄러워하고 있는 소설집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격려차 건넨 의례적 덕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심사 독회에서 나온 쓴소리들을 선의로 생략해버렸을 김 기자의 배려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 분들의 호의에 고마움을 표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작품의 됨됨이로 보나 조선일보에 대해 취해온 입장으로 보나 도저히 이 상의 수상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고 그 얼굴을 지면에 실은 데 대해 조선일보 쪽에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조선일보와 동인문학상에 대해 던져온 비판적 발언들을 김 기자나 심사위원들이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한 움큼의 유쾌함도 내가 누릴 수 없는 것은, 주겠다는 상을 거부하겠다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심사 독회에 올랐을 뿐 수상자로 선정될 가능성은 거의 없는데 거부라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가? 그렇다고 제 작품이 제가 비판해온 문학상의 후보에 오른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고 있는 꼴은 또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나쁜 뜻이야 없었겠으나 결국, 조선일보 지면은 나를 조롱한 셈이다.
비록 선의에서라고 할지라도 이런 조롱의 장면을 만들어낸 분들께, 나는 이 상과 관련해 내 이름이 거론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정중히 전하고 싶다. 끝으로 사소하다면 사소하달 지적을 하나 하고 싶다. 김 기자는 내 소설집 제목을 '엘리아의 노래'라고 썼으나, 그것은 '엘리아의 제야'로 고쳐져야 할 터이다. 제야가 코앞이다. 두루 근하갑신(謹賀甲申).
고 종 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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