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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89>에르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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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989>에르미트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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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2년 12월24일 프랑스 수학자 샤를 에르미트가 로렌주 디외즈에서 태어났다. 1901년 파리에서 몰(沒). 에르미트는 대수학과 해석학 분야에서 19세기 수학을 집대성한 사람이다. 가우스의 수론, 아벨과 야코비의 타원함수론, 불·케일리·실베스터 등 영국학파의 대수적 불변식론 따위가 에르미트의 체계로 흘러 들어 통합되었다. 에르미트 연산자, 에르미트 행렬, 에르미트 형식 같은 용어들은 그가 수학사에 남긴 흔적의 일부다.그러나 에르미트의 학창 시절은 불운했다. 이미 10대에 라그랑주의 수치방정식 논문과 가우스의 '정수론 연구'를 독파한 이 천재의 학교 성적은 중간 이하였다. 학교에서 배우는 초급 수학을 그는 늘 어려워했다. 루이르그랑 고등학교 선배 에바리스트 갈루아처럼, 에르미트도 시험관보다 뛰어난 수험생은 불행해지기 마련이라는 격언의 예증이었다. 그러나 에르미트가 갈루아만큼 불행해지지는 않았다. 15년 전 갈루아를 구하려다 실패한 이 학교의 리샤르 교사가 범용함으로 천재를 억누르려는 다른 교사들의 폭력으로부터 에르미트를 철저히 보호했기 때문이다.

갈루아가 낙방했던 파리이공대학에 에르미트는 턱걸이로 붙었다. 그러나 그는 일년 뒤 학교에서 쫓겨났다. 프랑스 자연과학의 산실이라는 이 대학 교수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뛰어난 수학자였던 한 학생을 낙방시킨 데 이어, 또 다른 학생을 일단 받아들인 뒤 내친 것이다. 그러나 에르미트는 그 뒤의 삶을 통해 이 치욕을 보상했다. 자신을 내친 파리이공대학의 입학시험관으로 교직 생활을 시작한 그는 콜레주드프랑스, 파리고등사범학교, 소르본대학 교수를 잇따라 거치며 프랑스 수학계의 좌장이 되었다. 그는 또 제자들의 천재를 즉각 알아보는 눈밝은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 스승을 만난 것은 그 스승 못지않은 수학자였던 앙리 푸앵카레의 복이었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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