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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산행 한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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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영신 산행 한라산

입력
2003.1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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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는 더 그렇다. 제주도의 날씨는 짐작을 할 수 없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뀐다. 밤새 비가 내리는 것 같더니 새벽에는 별이 총총하다. '산 아래에 비가 왔으니 산 위에는 눈이 내렸겠지.' 기대를 잔뜩 해본다. 희미하게나마 길이 보이기 시작하는 아침 7시에 출발했다. 성판악 코스이다. 한라산에 오르는 길은 모두 4곳. 성판악 코스는 9.8㎞로 가장 길다. 최소한 왕복 8시간을 잡아야 한다. 대신 제일 편하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해발 1,950m)을 오르는 길이 이렇게 평탄할 수가.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른다. 등산객 중에는 어린 아이들도 많다. 해발 750m 지점에서 등산이 시작된다. 약 1,200m를 오르는 여정이다.역시 날씨를 예상할 수 없다. 30분 정도 걸었을까. 먼 곳에서 동이 터 온다. 시야가 밝아진다. 낙엽을 떨군 나무들의 앙상한 가지가 눈에 들어온다. 나뭇가지를 감싸고 있는 것은 우유빛 안개다. 산 아래에서 보았다면 구름이었을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들이 안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을 받아 반짝거린다. 몽롱한 분위기이다.

아직 눈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발 아래로 푸른 잎들이 흔들린다. 한라산은 '대나무산'이다. 굵고 키가 큰 대나무가 아니라 사람의 허리 정도 되는 산죽(山竹)이다. 이 대나무의 줄기로 조리를 만든다고 해서 '조릿대'라고 부른다. 조릿대는 한라산을 빙 둘러 전역에 분포하고 있다. 정상 부근을 제외하고는 산행 내내 조릿대숲을 지나게 된다.

해발 1,000m를 넘으니까 길이 바뀐다. 눈길이다. 눈은 나뭇가지나 조릿대잎에는 없다. 길과 숲의 바닥에만 쌓였다. 바람 때문이다. 매섭기로 유명한 한라산의 바람은 나무에 쌓인 눈을 몽땅 훑어 바닥에 내려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바람 소리가 난다. 이 곳의 바람 소리는 다르다. 수천 마리의 말떼가 평원을 달리는 것 같다. 멀리서 시작된 말발굽 소리가 서서히 다가왔다가 지나간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섭다. 그러나 바람은 숲 위로 지나간다. 숲길에 들어있는 사람은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이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인다.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했다. 사람 키 만한 진달래 나무가 너른 평원에 펼쳐져 있다. 진달래숲은 예사롭지 않다. 바람에 실려 온 안개가 가지에 얼어붙었다. 녹았다가 얼기를 반복해 유리처럼 맑다. 빙화(氷花)라고 한다. 햇살을 반사하며 반짝거린다. 마치 유리로 만든 숲에 들어온 느낌이다. 겨울을 실감한다.

대피소에서는 멀리 정상이 보인다. 듬성듬성 하얀 눈이 눈에 띈다. "꼭대기에는 눈이 많이 쌓였나요?" "일단 올라가 보시죠." 대피소 직원은 자신만만하다는 표정이다.

과연 그랬다. 해발 1,700m를 넘으니 세상이 바뀐다. 하얀 눈나라이다. '은빛 설원'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너무 하얗다. 산에 오르던 사람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발에 아이젠을 부착한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환하게 웃는다. 다리품을 판 보람을 느끼는 표정이다.

드디어 정상. 백록담은 하얀 가마솥 같다. 그 안에 하얀 밥이 익고 있다. 정상 부근의 눈 세상은 낮은 지역의 그것과 모습이 다르다. 눈과 바람이 일구어낸 예술품이다. 바람에 실려 온 눈은 위에서 아래로 쌓이지 않고 옆으로 쌓였다. 흔들리지 않는 등산로의 나무 난간에 옆으로 쌓인 눈은 거의 어린 아이의 키만하다. 옆으로 자라는 고드름 같다.

한 등산객이 하얀 백록담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잘∼ 가라∼,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라∼." 무엇을 보내는 것일까. 아마도 세월일 것이다. 다시 돌아오지 말라고 했으니 그에게 올 한 해는 무척 힘들었나 보다. 돌아서서 웃음을 짓는 그의 표정이 하얀 눈 세상처럼 밝다.

/제주=글·사진 권오현기자 koh@hk.co.kr

● 한라산 등반법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한라산은 그러나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이기도 하다. 비교적 산길이 완만하다. 봄과 가을이면 제주 지역의 초등학교가 소풍 프로그램으로 한라산 등반을 택할 정도이다.

겨울에는 주의할 점이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 악천후일 경우 관리소에서 입산을 통제하지만 산행 중 날씨가 변하는 경우가 많다. 눈발이나 바람이 거칠어지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려 하산해야 한다. 등산로가 대부분 울퉁불퉁한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신발을 제대로 신어야 한다.

한라산 등산로는 모두 4곳이다. 이중 성판악 코스와 관음사 코스는 정상인 백록담에 오를 수 있고 영실 코스와 어리목 코스는 1,700m 고지인 윗새오름까지만 등산이 가능하다. 윗새오름에서 백록담까지의 길은 자연 휴식년제 시행으로 등산이 금지되어 있다.

성판악 코스(관리사무소 064-725-9950)=편도 9.8㎞로 한라산 등산로 중 가장 길다. 왕복 9시간 정도를 잡아야 한다. 대신 가장 평탄하다. 한라산은 야간 산행이 금지되어 있는 산. 그래서 오전 9시 이전에 등산을 시작해야 일몰 전에 하산할 수 있다. 산길에는 물이 없다. 중간 지점에 샘물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얼어있다. 식수를 충분히 준비한다.

관음사 코스(756-9950)=편도 8.7㎞의 등산로. 비교적 험하다. 성판악 코스보다 길이는 짧지만 가파르기 때문에 왕복 10시간 정도 걸린다. 겨울에는 종종 산행이 금지되는 코스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오전 9시 이후에는 입산을 통제한다. 성판악 코스로 백록담에 오른 뒤에 이 길로 하산하는 등산법이 인기이다.

영실 코스(747-9950)=한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등산로이다. 등산로 옆으로 펼쳐지는 영실기암(일명 오백나한)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편도 3.7㎞로 왕복 4시간이면 충분하다. 가파른 바윗길이 절반, 완만한 능선길이 절반이다. 정오까지 입산이 가능하다. 백록담 등정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 아쉽다.

어리목 코스(713-9950)=편도 4.7㎞, 왕복 4시간의 완만한 코스. 윗새오름에서 영실 코스와 만난다. 역시 정오까지 입산해야 한다. 영실 코스로 올라 이 코스로 하산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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